축사 | 학보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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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대학교 다우미디어센터
  • 승인 2018.06.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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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석 정동아대 총장
한석정 동아대학교 총장

 19세기 후반부터 만주로 유랑갔던 조선인들이 이루었던 중요한 업적은 척박한 황무지를 일궈 벼농사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이 시작해서 확장된 만주의 광대한 싼쟝(三江)평야의 쌀을 최고로 칩니다. 그리고 재만 조선인들이 했던 일은 한글신문을 만들어 동네소식과 민족의 자부심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의 전기를 보면 1930년대 초 남만주의 항일 조선혁명군과 중국의 랴오닝민중자위군이 힘을 합쳤을 때 전자는 『합작』이라는 한글 신문을 발행하며 그 독자성을 보장받았습니다. 신문은 정체성의 뜻입니다. 초기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 다른 인류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종류를 사피엔스라 하며, 도구의 특성을 강조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 유희 본능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등으로 인류를 다양하게 부릅니다. 20세기 재만 조선인들은 호모 커뮤니칸스(Homo Communicans), 즉 커뮤니케이션의 주체자들입니다. 

 동아인들도 그런 종(種)입니다. 전국대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신문 중 하나인 동아대 학보를 만들었으니. 부민캠퍼스 앞에는 1946년 설립자 석당선생이 초대 교수진과 함께 대신동 산자락의 자그만 교사와 현판을 배경으로 찍은 옛 사진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사진 속의 교수진은 20여 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법과는 전국 최강이었습니다. 석당선생은 해방전 명문 경성제2고보(오늘날 경복고교)와 릿쓰메이칸대학, 그리고 어려운 일본 사법고시 합격자 출신인데 그 동료 합격자나 후배들을 교수진으로 초청했습니다. 

 70년 전 동아대 신입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새 학교를 세우는 열의 하나로 학보를 발간했습니다. 이들은 전기 보급이 여의치 않을 시절이라 밤에 자취방에서 호롱불이나 촛불 아래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몽당연필로 긁적였을 것입니다. 볼펜, 만년필, 사인펜 등 첨단의 필기류가 보급되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본격 연필회사인 대전의 동아연필이 문을 연 것이 1946년이었습니다. 새 연필은 당시 모든 학생, 지식인들이 선망하는, 그래서 매우 아껴 써야할 도구였습니다. 

 동아학보의 새 편집인들은 독립투사의 심사로 거의 한자 투로 대학 공동체의 뉴스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담아내었습니다. 창간호에는 문교부장(장관) 오천석의 축사, 강사 임학찬의 한시, '축 동아대학' 이외에도, 법과 배철세, 문학과 교수 조향(趙鄕)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조향은 초현실주의 시로 한국문학사에 남는 인물입니다. 또한 '다음에 올 학우를 위한 교직원과 학생대표들의 연석회의' 뉴스가 실린 것을 보면 함께 앉아 길을 묻는다는 석당의 교육철학인 동좌문도(同坐問道)가 일찍 시행된 듯합니다. 또한 '인문의 전당, 문호는 열린다'는 제목으로 인문 과외 특별강좌 소식과 체육대회, 특히 동아대생들의 복싱 대회 승전보 등이 실려 있습니다. 법학, 인문학, 체육 등 동아대의 세 전통이 일찍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작년 발견된 학보 2호에도 배철세 교수의 논문이 사학자 정중환 교수의 글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학생 기고자들은 '조선경제와 인플레이션', '경제적 독립없이 정치적 독립없다', '민족해방의 봉화!'(일제시기 광주학생사건을 추모하는 글), '총파탄에 빠진 남조선 경제상', '교육의 기회균등', '유물사관에 대한 논고', '사이비(일본식) 문화를 일소하라!' 등 제목으로 건국 직후의 정치, 경제, 문화 전체를 논하던 우국지사였습니다. 후일 동아대 상경과의 간판 김서봉(金瑞鳳) 교수도 학생 신분으로 '이마 철학'이라는 수필을 기고했습니다. 

 이것이 동아의 시작이었습니다. 소설가 김동리가 호롱불 아래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 연필로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을 쓰며 본격 한국문학을 시작하던 그 시절입니다. 동아대 개교의 위업은 해방과 건국의 고동, 문학의 태동 속에서 쟁쟁한 은사들의 열정, 청년학도들의 기개(그리고 몽당연필)와 함께 이뤄졌습니다. 그 이후 대학 최고의 엘리트들이 입사하여 역동적인 동아학보의 전통을 이어나갔습니다. 학보사 기자들은 졸업 후 언론계, 학계, 관계로 진출했습니다. 

 저는 1983년 동아대 강단에 선 이래 학보사 논설위원을 맡으면서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습니다. 신군부가 광주항쟁 진압 후 『창비』와 『문학과 지성』 등 문예지를 폐간하고,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시절이었습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요, 해직교수 출신인 김민남 교수님이 복직하여 같은 연구실을 쓰게 되었습니다. 해직교수 출신이라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을 때였다. 저는 의도적으로 얼려 다녔습니다. 마침내 김교수님이 학보사 주간이 되자 우리는 그를 '학보사 사장님'이라 추켜세우며 긴 야인시절의 탈출을 축하했습니다. '사장님'은 저를 논설위원으로 위촉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당시 민감한 주제를 논설에 쓰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학생기자들과 얼려 방학 때마다 연수를 다니며 동고동락했습니다. 이것은 제 청춘의 한 페이지입니다. 그 이래 학보사에 30여 편의 글을 기고했으니 저는 아마도 최다 기고자일 것입니다. 

 저는 총장에 취임한 이래 한강이남 명문 사학 동아대의 전통을 발굴, 선양하는 작업을 펴고 있습니다. '동아문화의 창달'이 그것입니다. 조상의 위업을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자손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겠습니까. 대학의 위기, 사학의 위기 속에서 절실한 것은 양적 팽창이 아닌 정체성 찾기입니다. 법학, 인문학, 스포츠 등 전통분야의 위업을 찾아 계승하며, 그 연장에서 무도와 인성, 공동체 정신, 환경과 국제화 소양을 갖춘 전인적인 동아젠틀맨을 양성하고자 합니다. 동아대는 영광의 70년 역사를 뒤로 하고 백년의 고지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동아대 학보사 역시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 대학의 역사와 문화 창달에 일조해왔습니다. 앞으로도 동아대학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창출해내며 후배들을 참된 길로 이끌어주는 대학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학보 창간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무궁무진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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