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7090'
백 투 더 '7090'
  • 강주희 기자
  • 승인 2018.06.0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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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中)

 유명한 시의 한 구절처럼 고난과 역경 없이 영광을 마주하기란 어렵다. 동아대학보는 1948년 6월 15일에 발행된 제1호를 뒤이어 현재 제1143호까지 발행됐다.(본호 제1144호) 70년이라는 긴 역사를 걸어오며 대학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학보사 기자들은 매일 밤을 지새우며 고군분투해왔다. 

*학보사 동문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배형우(국문학 '73 졸) 동문 

#그래도 낭만이 있던 시절  

 그 당시엔 학보사 창구에서 직접 학생들에게 학보를 나눠줬다. 활자 크기부터 사진 선택까지 기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학보사에 들어가면 열패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학보사 수습기자 선발시험에 지원했다. 수습기자 모집 당시 70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4명만 뽑혔다. 대학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당시 학생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배 기자님'이라 불릴 때면 자긍심이 생겼다. 국제시장에 있었던 새글 인쇄소, 이후엔 괴정에 있었던 우리 대학 농과대학 내의 대학출판사에서 조판해 순간(旬刊 : 신문을 열흘에 한 번씩 간행하는 일)으로 발행하던 시절이었다. 신문이 발행되면 편집인은 수고한 기자들에게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었는데, 언제였던가! 술에 얼큰하게 취했을 무렵 편집인은 장미꽃을 사서 기자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줬다. 그 장미를 들고 남포동 거리를 활보하던 일이 선명하다. 시대의 울분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자갈치시장의 좌판 석쇠 위에서 꼬무락거리는 꼼장어구이와 막소주로 혈기를 분출하던 시절! 당시엔 그 나름대로 낭만이겠다. 

 학보사에 들어갔으니 학내동아리 활동은 하지 않았다. 학보사 생활이 대학생활 그 자체였기에 공부에 전념할 시간도 부족했고 당연히 학과 생활도 등한시하게 됐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학보사 기자는 할 것 같다. 2년여간의 학보사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은 '올곧은 정신'이었다. 부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선 생리적으로 반발심이 생겼다. 불의를 보면 간과하지 못했던 게 그때의 학보사 기자들을 단단한 결속력으로 묶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생리적 현상이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도, 단순히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가끔 사회적 문제와 연계해 소리를 높이고 열을 냈던 건 학보사에서 형성된 성향 탓이 아닌가 싶다. 

 '언론인이 되어볼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대 상황적으로 언론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기자의 꿈을 접었다. 그래서 제자 중에서 언론 쪽을 희망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땐 그랬지  

 그땐 이런저런 일로 구덕캠퍼스 법경대 안에 있던 편집실에서 지내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음 날 아침이면 석당도서관 뒤편 구덕산 골짜기에 들어가 맑은 물에 세수를 하곤 했다. 편집실에는 세면도구를 비치해놨었다. 당시에는 순간으로 발행했는데 열악한 조건에서 하루하루가 숙제 같았다. 기자 중 학점을 제대로 받은 기자들이 몇 없었다. '시그날'이라는 학보코너 기사 하나를 쓰는데도 끙끙 앓았다. 시그날은 날카로운 시각으로 학내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코너였다. 시그날 때문에 인쇄소 근방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끝없는 고민의 이유는 '진정성 없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교수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지만, 학보사 기자들은 교수식당에 가서 교수와 밥을 같이 먹곤 했다. 많은 교수들과 면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때 학보 3면은 학술면이었는데, 학술지에 발표 기회가 많지 않았던 때라 일부 교수들은 자신의 논문을 학보에 게재하려고 학생기자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했다. 총학생회와 대의원회도 학보사의 위상을 존중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일명 '학보사 풀통 사건'으로 학생기자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나는 '대학신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기획 기사를 작성해서 실었는데, 편집인이 내가 쓴 기사의 중간 제목인 '당국의 시녀에서 벗어나야'를 문제 삼아 고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지 않고 신문을 발행했고, 그게 배부 전에 신문을 받아본 발행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학내 배부처에 나가는 부수만큼 '시녀' 두 글자에 인쇄 잉크를 찍어 가리는 작업 끝에 일단 흐지부지 일단락됐으나 치욕스러운 기억이다. 시쳇말로 '알아서 기는 시대'의 대학 당국의 모습이었다. 

 이후 편집인은 기자들에게 '전국고교 시화 전시대회' 포스터를 부산의 각 고등학교 게시판에 붙이게 했다. 그런데 편집실에 남아있는 풀을 보고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노발대발하며 풀통(바케쓰)을 편집실 벽에 던져 벽이 온통 풀 범벅이 됐다. 그 이전의 기사가 문제였던 것이라고 짐작됐다. 우리는 이를 학보사 기자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이 깨진 것으로 판단했고 결국 동기들과 사퇴를 결정했다.
 
#학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엄혹했던 1970년대 우리 대학 학보를 보면 기성 언론처럼 생생한 현장감과 투철한 문제의식을 가진 기사를 더러 볼 수 있는데, 모두 기자들의 발에서부터 나온 결과물이다. 기사는 발로 쓰는 거라며 입사한 후배에게 운동화를 선물해 준 적도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앉아서 생각하고 추론하여 쓴 기사는 진정성이 떨어지고 오류가 날 가능성이 큰 법이기에 기사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 써야 한다. 특히 학보는 속보성보다 정확성이 우선이다. 사실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주는 것도 중요하다. 학보를 읽은 학내 구성원들이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은 사회에서 가장 선도적이고 양심적인 곳으로 자리매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개선이 필요하다. 항상 양보다는 질이다. 어느 시대든 기사는 질이 중요하고 대학신문으로서 할 바를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자유! 진리! 정의! 정론·직필!

 



 1993년 4월, 우리 대학은 학교 측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 문제와 학교 관계자 자녀 등을 포함한 대규모 입시부정에 대한 고발로 인해 시끄러웠다. 그 당시 학보 발행인 이상윤 총장은 이신철 주간 교수를 통해 등록금 사태와 재단 관련 비리를 다룬 기사와 사설을 총장 담화문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보사 편집국 기자들은 '독자들의 알 권리와 정확한 사태 전달의 필요성을 가로막는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이 총장은 직접 학보 제작 중단 지시를 내렸고 제778호는 전면 제작 중단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학보사 국·부장단이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고 기자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자체 소식지 <자주언론>을 만들었다. 거기에 학내사태에 관한 소식을 담아 학교 전역에 배부했다. 비난 여론이 학내·외로 거세지자 학교 당국은 끝내 사과했고 학보의 편집자율권 보장 등에 관해서도 합의했다. 덕분에 학보는 다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박영희(신문방송학 '94 졸) 동문

#수습기자에서부터

 당시 학보는 대다수의 관심을 받는 매체였다. 총장이 '학보 기사를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공신력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학보사는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조직은 굴러가야 하고 정보를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는데 시간은 없고, 기자들은 실력이 모자랐다. 
 
 그 시기에 나는 기자모집 공고를 보고 학보사에 지원했다. 5월에 시험을 치른 후 수습기자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당시 수습은 주로 기사 쓰는 법을 배웠고 매일 저녁에는 '업무마감' 즉, 취재 보고서를 써야 했다. 취재부장이 '이 내용 더 취재해봐'라고 지시하면 밤새 취재했고 매일 기사 원고를 써내야 했다. 나는 신문방송학과라 그랬는지 교수님들과 주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씩 8면짜리 신문을 발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기사를 쓰며 갈등이 생기는 건 물론이었고 도망쳐 나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보의 힘을 믿고 기사를 썼다. 특히 총학생회가 주기적으로 연 집회에서 학보가 큰 역할을 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항상 모든 것을 보고 기록했다. 집회·시위와 같은 전투적 자리에 참여해서 직접 보고 듣고 기사를 써 내려갔다. 학생으로서, 동료로서 현장에서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지 못한 탓에 부당한 입장에 처하는 일을 방지하고 언론인으로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는 참여하기보다 기록해야 했다. 

#칼보다 펜이 강할 때 

 1993년 4월, 학생들은 '학생은 교육의 대상일 뿐 협의의 대상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제시하는 이상윤 총장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학교는 홍보지를 원했고 학보사는 언론을 원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내가 부장이 되자마자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등록금 협상 결과를 통보했다. 총학생회는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고지서를 모아 투쟁하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 대학당국에서 지시를 받은 당시 주간교수는 '내가 말하는 부분은 학보에서 빼라'고 말했다. 우리는 학생 신분을 넘어 언론인으로서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지 단순히 학생들의 주장을 실은 게 아니었다. 기사수정을 거부하자 결국 신문은 한 달여간 발간되지 못했고 이에 학보사는 독립을 선언했다. 20일 이상 단식을 하는 와중에도 기사를 썼다. 많은 학생의 도움으로 학내 제보를 받고 밤새 기사를 써 제작·배포했다. 그때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됐는지 그런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했다. 언론기구는 법을 어기는 사회 곳곳의 문제를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 

#다시 돌아간대도 

 현재도 나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글 쓰는 방법의 9할 정도는 학보사에서 배운 것이다. 치열하게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며 '신념'에 대해 배웠다. 기술, 기능은 나이가 들면 뒤처질 수밖에 없지만 20대 초반 학보사에서 배운 신념은 지금껏 나를 지탱해줬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많은 시간을 쏟았고 때론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든 학보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학보사 기자가 되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운명처럼 그렇게 할 것 같다. 

 국장을 맡았던 시절 학보코너 중에 '데스크의 눈'이라고 온 힘을 다해 쓰던 칼럼이 있었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참 부끄러운 글들이다. 그런데 그때는 화제성이 있었고 반응도 좋았다. 종종 교수님들이 정말 '네가 쓴 글이 맞냐?'고 묻는 일도 있었다. 단순히 한 사람의 필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당시 학보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때처럼 동아대학보가 현재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언론이길 바란다. 대학 언론이 건강해야 대학도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주희 기자, 김아현·김장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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