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푸른 정의, 학보에 물들다
유월의 푸른 정의, 학보에 물들다
  • 우수현 기자
  • 승인 2018.06.0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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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글은 묵을수록 아름답다.(※묵다-일정한 때를 지나서 오래된 상태가 되다)

 노인의 주름을 보면 삶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통해 연륜을 쌓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래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글, 특히 신문은 당시의 사건과 시대적 분위기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묵을수록 아름다운'것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우리 대학교 학보사는 창간 70주년을 맞았다. 다우미디어센터(학보사와 방송국 통합 운영)의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학보 축쇄판을 보면 그간 '동아대학보'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보이는 듯도 하다. 이렇게 '묵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오랜 시간 유지돼 온 학보사는 그간 많은 희로애락을 겪었다. 기쁨과 슬픔은 공존한다고 했던가. 학보사에도 가장 흥성했으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움이 컸던 시기가 있었다. 이번 호 7면에서는 학보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토록 학보가 오래 묵을 수 있도록 발판이 돼준 그 시기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현장 동아대학교

 "서울에 이한열이 있다면 부산에는 이태춘이 있다." 

 우리 대학은 6월 민주 항쟁의 역사적 영웅을 배출했다. 고(故) 이태춘(무역학 '86 졸)  열사는 우리 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태광고무(주)'에서 일하던 건실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18일, 그는 싸늘한 주검이 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동구 좌천동 고가도로에서 열렸던 6월 민주항쟁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다리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바로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지만 엿새 후인 24일,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사인을 단순 추락으로 발표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죽음을 애도했고, 이후에도 이태춘 열사의 어머니인 박영옥 씨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한 스물여덟 청년 이태춘 열사를 잊지 않은 것이다. 이태춘 열사는 여전히 6월이 되면 우리 대학 후배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후배들에게 그는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애썼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된다.

 이태춘 열사 외에도 우리 대학 근처를 돌아보면 당시의 시대적 흔적을 되짚어볼 만한 장소가 존재한다.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에 위치한 부민캠퍼스 근처의 '바보면家'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부민캠퍼스 학생이라면 이 건물을 보지 못 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왼쪽 사진이 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일했던 법률 사무소 건물이다. 이 법률 사무소 안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왼쪽 사진이 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일했던 법률 사무소 건물이다. 이 법률 사무소 안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두 사진 중 왼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일했던 법률 사무소의 모습이다. 현재는 이렇게 그 흔적이 사라진 채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바보면家'만이 남아있다. 영화 <변호인>(감독 양우석, 2013)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법률사무소를 재현한 공간이 여러 번 등장한다. 70년 세월을 우뚝 버텨온 우리 대학 안팎에는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다.

 

부림 사건을 통해 보는 
암울했던 시기의 언론사

 영화 <변호인>은 1981년 9월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부림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림 사건이란 부산 학림 사건의 준말로, 전두환 치하의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반공 세력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당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가졌던 부산지역 학생과 회사원 등 22명은 까닭도 모른 채 강압적인 고문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언론매체가 발달한 오늘날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와 같은 불합리한 사건은 군사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에 기반을 두고 발생했다. 총칼보다 강한 것이 펜의 힘이라 했다. 하지만 군사 독재 정권 치하의 언론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신성호(성균관대 신문방송학) 교수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성호 교수는 '1987 박종철 보도, 군사정권 향한 격발'(시사오늘, 2018.1.9.)에서 "이 사건의 보도는 하나의 '격발 장치'였다"며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압 정치로 표출을 못 하고 시민들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 이를 계기로 겉으로 표출됐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보도 이전에는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 하에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사전에 등재된 6월 민주 항쟁의 공식적인 계기는 4.13 호헌조치다. 4·13 호헌조치는 1987년 4월 13일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것을 말한다. 당시 정부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배경을 파악하자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경위와 이후 정부가 그를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들통 났던 일을 알아야 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과 폭행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다. 처음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이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의 보도를 통해 사인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고, 정부는 뒤늦게 사인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이처럼 언론은 국민이 알아야 할 사실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권리를 되찾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언론이 올바른 보도를 하지 못했을 때 사회에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가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자 국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민주화를 앞당기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심연우 기자]

 

역사의 산증인이 들려주는 87년

 "데모하는 게 천벌 받으면 데모하게 만든 사람들은 무슨 벌 받습니까?"

 영화 <변호인> 속 진우(임시완 분)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데모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사회 분위기를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본지는 당대 우리 대학 부총학생회장으로서 87항쟁에 참여했던 윤준호(정치외교학 '92졸) 동문을 만나 당시 사회의 분위기와 6월 항쟁의 의미, 그리고 우리 대학 학보사의 보도에 대해서 들어봤다.

 그는 "87년 6월 항쟁에서 우리 대학 학생들은 현대사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 대학 학생들은 자주 의식과 독재 타도에 대한 의식이 다른 대학보다 투철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규모와 내용 면에서 시위를 주도했으며 박종철 고문 사건 때도 학내 민주화 운동을 통해 거의 매일 만 명씩 독재 타도를 외쳤다"고 말했다. 또, "당시 우리 대학 이동균 총학생회장은 부산지역 총학생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며 "우리 대학이 부산에서 민주항쟁을 선도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준호 동문은 그 해의 6월 18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후에 '최루탄 추방의 날'로 지정된 6월 18일은 우리 대학 이태춘 열사가 사망한 날이다. 윤준호 동문에게 이태춘 열사는 선배였다. 그는 당시 이태춘 열사의 죽음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태춘 선배는 우연히 시위에 참여한 게 아니다. 그분의 일기를 보면 독재에 대한 염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고민이 뜨겁게 느껴진다"며 "원래 운동권에 속해 있던 분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대의를 깨닫고 항쟁 대열에 있다가 과잉 진압 때문에 사망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태춘 선배 외에도) 외압에 휘말린 우리 대학 학생이 많았다. 강제로 연행돼 고문을 받았다"고 전했다. 

 윤준호 동문은 당시 우리 대학 학보사의 보도에 대해서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대학 학보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부적 충돌이 있긴 했지만 87년부터 시작된 학내 민주화의 영향으로 사실을 은폐하려는 공작에는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준호 동문은 "대학생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 대학의 교시인 '자유·진리·정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도전하고, 정의에 민감하며, 진리에 투철해야 한다.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말을 전했다. 

85년도 5월 경(추정) 우리 대학에 붙여졌던 대자보 중 일부
85년도 5월 경(추정) 우리 대학에 붙여졌던 대자보 중 일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당시의 언론은 시대적 분위기에 굴복해 불합리를 야기한 군사 독재 정권을 제대로 고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도 한 줄기 빛은 존재했다. 영화 <변호인>에서 기자인 윤택(이성민 분)은 생계유지를 위해 정부의 언론 통제와 조작을 모른 척한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기자들이 해고되는 것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진 채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외국 기자들을 데려와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 장면은 우리에게 올바른 언론의 역할을 시사한다. 윤택뿐만 아니라 동아대학보 기자들도 당시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현재 학보사에서 기획취재부장을 맡고 있는 안다현(철학생명의료윤리학 3) 기자는 "80년대에 학보사에서 활동했던 동문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학보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교직원들이 본인을 비판하는 기사가 학보에 실리지는 않을지 걱정했을 정도라고 한다"며 "당시 학생 기자들은 항상 기삿거리를 찾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사회에 불합리한 일이 생기면 곧장 취재를 나가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며 "정의를 좇고 진실을 밝히려는 선배들의 기자정신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우수현 기자·이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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