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당신이 만날 '오아시스'
[그날] 당신이 만날 '오아시스'
  • 강주희 기자
  • 승인 2019.03.04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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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에 그들의 이야기

1908년 3월 8일, 뉴욕 러트거스 광장을 가득 메운 여성 노동자들.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성적 괴롭힘 △불공평한 대우에 맞서 싸우기 위한 그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생존을 위한 그녀들의 투쟁구호는 "빵과 장미를 달라".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뜻했다. 이를 기념해 UN에서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1975년, UN이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그날. 부산 그곳에서는 어떤 풍경이 그려졌을까. 기자는 여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던 시기에 여성이 주체가 되고 활력이 넘치던 그날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리 슬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서서 꿋꿋이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영도다리를 건너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에 도착하면 바닷바람과 줄지어 선 배들이 우리를 반긴다. 짠 바닷바람에 노출된 배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바닷물에 잠긴 아랫부분에는 따개비나 담치 같은 해양생물들이 다닥다닥 붙는다. 그것들은 배의 속도를 느리게 할 뿐 아니라 쇠를 부식시키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벗겨내고 새로 페인트를 칠해야 했다. '깡깡이'는 수리조선소에서 배 표면에 녹이 슬어 너덜너덜해진 페인트나 조개껍데기를 망치로 두드려 벗겨낼 때 '깡깡' 소리가 난다고 하여 생겨난 말이다.

 처음에 '깡깡이' 일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높은 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작업해야 하는 데다 작업 중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 먼지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된 깡깡이질에 나선 이들이 바로 대평동의 중년 여인들이었다. 깡깡이 아지매는 한국 근대 산업화의 주역이자 대평동이 수리조선으로 이름을 날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주인공들이다. 

 '깡깡이 아지매'들은 배를 수리하거나 새로 페인트칠할 때 배의 녹을 떨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끝이 납작한 끌처럼 생긴 망치로 쇠를 두드려 배에 붙어 있는 녹을 떨어낸 다음 쇠 솔로 다시 한 번 더 문질러 남은 녹까지 깨끗하게 털어내는 일을 했다. 수리하는 배의 안과 밖, 구석구석까지 깡깡이 아지매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깡깡깡…". 깡깡이 아지매들은 자신들의 삶에 녹처럼 붙어 있는 가난을 떨어내듯 안간힘을 다해 망치질했다. 

출처=예스24
출처=예스24

 책 『깡깡이』 (한정기, 특별한서재, 2018)는 그 시절 영도 대평동 골목을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정은의 엄마는 다섯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깡깡이 일을 한다. 동생 넷을 둔 정은은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가 없다. 소설의 배경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깡깡이 일을 하며 다섯 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던 엄마와 맏딸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에게 희생한 정은이 등장한다. 

 공부는 아들만 시키고, 딸은 "남자 잘 만나 시집가는 게 좋은 팔자다"라고 생각하던 그 시절. 엄마와 정은은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맏딸이라서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어려운 환경을 딛고 발돋움하려는 의지로 가득 찬 인물이 바로 정은이다. 어머니 또한 정은이 자신과 같은 절차를 밟지 않도록 맏딸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니는 내처럼 맏딸이라는 말에 묶여 살지 마라. 사람은 배워야 제대로 대접받고 살 수 있는기라…(중략)" 

 엄마의 손은 평생 깡깡이 망치만 쥔 탓에 앙상한 가죽만 남았다. 110년 전, 뉴욕 광장에서 '빵과 장미'를 외치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그 손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따닥따닥 달라붙는 가난과 역경을 소리 내지 않고 망치질로 힘껏 내리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삶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메마른 사막에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오아시스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 '메마른 사막'은 정은이 살던 대평동이었으며, '오아시스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는 고된 삶을 견뎌내는 대평동 사람들을 말했다. '오아시스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정은의 꿈이다. 깡깡이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지친 엄마처럼, 지치고 힘든 사람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자 공부를 놓지 않겠다던 맏딸. 훗날 정은이 만날 오아시스는 그날 여성들이 꿈꿨던 '빵과 장미'가 모자람 없는 그곳이지   않을까.

그 당시 '깡깡이' 작업중인 깡깡이 아지매들, 출처=깡깡이 예술마을
그 당시 '깡깡이' 작업중인 깡깡이 아지매들, 출처=깡깡이 예술마을

강주희 기자
1714242@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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