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주년, 한 세기 역사와 마주하다
한국영화 100주년, 한 세기 역사와 마주하다
  • 노병재 기자
  • 승인 2019.09.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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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주년 트레일러 포스터 출처=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국영화 100주년 트레일러 포스터
<출처=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55년 단성사의 모습 출처=경향신문
1955년 단성사의 모습
<출처=경향신문>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로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을 비치우매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 활동사진임으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더라." 

위는 1919년 10월 29일, 서울 종로 단성사의 상영 모습을 그린 ' 매일신보'의 기사다. 기사는 100년 전, 한국 영화가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사실을 알리며 당시 영화를 처음 접한 조선 사람들의 흥미로운 감정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최초 상영 이후, 한국 영화는 어느덧 대중들과 10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특히 이번 해는 <기생충>(감독 봉준호, 2019)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경사가 일어나는 등 한국 영화계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이에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를 조직해 한국 영화의 역사를 축하·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추진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장호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의 눈에 띌 수 있게 <의리적 구토>(감독 김도산, 1919)를 퍼포먼스로 만들 예정"이라고 밝히며 "대중성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다('이장호 감독 韓영화는 늘 위기 속에 있었다'(YTN, 2019.08.20.) 참고).

이 외에도 추진위는 △한국영화 감독 100인이 만드는 '100인 100편' 영상 △다큐멘터리 제작 △한국 영화사 미래 100년을 전망하는 시리즈 영상 △세미나 △100가지 주요한 장면과 사건을 소개하는 100년 100경 전시 △인명사전 제작 △중요한 필름영화의 디지털 복원 △기념우표 발행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국영화 100주년, 국가적 문화산업으로 우뚝 서다

한국영화는 우리나라의 시대상과 역사를 담아내며 함께 성장해왔다.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어렵게 걸음마를 뗀 초창기부터 한국전쟁 이후 외국문화와 영상기술의 도입으로 빠르게 성장했던 1960년대, 유신정권의 검열과 TV 보급으로 침체기였던 1970년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며 암흑기로 접어든 1980년대를 지나 폭발적인 성장으로 독자적인 영화시장을 구축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영화는 다양한 형태와 장르를 조성하며 발전해 왔다.

한국영화가 어엿한 시장성 있는 문화산업으로 인정받은 후, 영화시장은 규모와 수준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올해 상반기 결산내용에 따르면, 국내 영화시장은 2013년을 기점으로 2조 원대 매출, 2억 명 이상 관객수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으며 관객 점유율도 50% 이상을 유지하는 등 영화산업의 규모가 크게 발전했다. 특히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4.25회로 나타났다. 이는 영화 관람이 대중의 여가에 빠질 수 없는 어엿한 문화생활로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우리 영화는 그 작품성을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한국 영화시장은 지난해 미국영화협회(MPAA) 기준 세계 5위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칸 영화제에서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감독 이두용, 1984)가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는 꾸준히 해외 유명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판권 계약도 활발히 이뤄지는 추세다.

김동완(체육학 3) 학생은 "한국영화가 과거보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도 많이 하고 개봉하는 영화의 소재도 다양해졌다"며 "주변을 돌아보면 영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보면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의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면에서 한국영화의 수준이 발전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태동한 한국영화, 그 아픈 역사

이렇듯 우리 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대단히 경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시작에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척박하고 열악한 창작환경을 견뎌낸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은 일본에 완전히 잠식돼 있었다. 특히 영화는 시각적 영상 매체로 대중에게 미치는 인상이 강렬하고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당시 조선총독부가 영화를 주요 선전 매체로 이용했다. 앞서 언급한 <의리적 구토>부터 최초의 극 형식 영화 <월하의 맹서>(감독 윤백남, 1923) 등 해방 전까지의 영화들은 대부분 일본의 통제 속에 있었다.

영화 제작·배급사의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영화는 제작단계부터 일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2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등장하는데, 이 회사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설립한 회사다.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현실을 환기하고 항일민족 의식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리랑>(감독 나운규, 1926)도  '요도 도라조'라는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제작됐다.

1940년에는 '조선영화령'이 발표되면서 한국영화의 명맥이 끊기는 수준에 이른다. 조선영화령은 일본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조선에 적용한 것으로, 일제의 군국주의에 찬동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제작되지 않으면 상영할 수 없게 했다. 또한 일본은 '조선영화주식회사'라는 조직을 설립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황국신민이 될 것을 옹호하는 선전용 국책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영화제작 및 배급업의 허가제 △영화인 등록조치 등 각종 검열과 규제를 통해 우리 영화를 탄압했다. 이에 조선의 영화인들은 일제에 순응해 친일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화 현장을 떠나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영화인들은 해방이 돼서야 정상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선영화령과 시행령이 폐지돼 이 해부터 한국영화의 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렇듯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 영화는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꿋꿋한 걸음을 걸으며 자생적인 영화산업을 일궈냈다.

<번지점프를 하다>(감독 김대승, 2001)와 <조선마술사>(감독 김대승, 2015) 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한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김대승 교수는 "역사의 질곡에 흔들리거나 부역한 부끄러운 날들도 있었지만 한국영화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른 나라의 영화, 문화와 교류하며 꾸준히 성장해 왔고 마침내 100주년에 이르렀다"며 "이는 온전히 우리 영화를 보며 함께 웃고 울어주신 관객들 덕분"이라고 감사를 전했다.

 

영화 김복동 포스터 출처=엣나인필름
영화 <김복동> 포스터
<출처=엣나인필름>

광복 74주년, 극장가에 부는 '보이콧 재팬' 바람 

 

한편, 최근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에 따른 불매운동 영향이 대중문화 전반에 번지면서 국내 극장가 역시 '보이콧 재팬'을 외치고 있다. 우리 영화계가 다시 한번 일본과 불편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지난 7월 24일에 개봉한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감독 나가오카 치카, 2019)은 국내에도 고정적 마니아층을 확보한 시리즈임에도 더빙판 개봉 논란과 보이콧 재팬의 흐름에 휩싸이며 흥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러한 흐름에 지난달 국내 개봉 예정이던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감독 야쿠와 신노스케, 2019)도 개봉을 무기한 연기한 상황이다. 최근 국내에서 재개봉한 <나는 예수님이 싫다>(감독 오쿠야마 히로시, 2018)와 <도쿄 오아시스>(감독 마츠모토 카나 외 1, 2011) 역시 상영관 확보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최근 개봉한 항일 관련 소재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했던 故김복동 할머니의 27년 여정을 담은 일본군 위안부 소재의 다큐멘터리 <김복동>(감독 송원근, 2019)과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전투를 기록한 영화 <봉오동 전투>(감독 원신연, 2019)는 시의와 맞물리며 '누구나 알아야 하고 봐야 하는 영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김복동>은 저예산으로 제작된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며 7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봉오동 전투> 역시 460만 관객을 돌파했다(2019년 8월 29일 기준). 항일영화의 흥행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민우(국제학 4) 학생은 "일본과의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최근 항일 관련 소재의 영화가 조명받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일시적인 여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일 소재 영화의 의미를 계속해서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극장가, 방송가 등 문화예술계에 부는 '보이콧 재팬' 열풍이 대중문화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화예술과 국가 간 외교적 감정은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화 <죽이고 싶은>(감독 조원희, 2010)과 <원더풀 고스트>(감독 조원희, 2018)를 연출한 조원희 영화감독은 "개인적으로 일본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어떠한 신념이나 생각이 영화를 선택하는 강제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중예술에 있어서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할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며 "현재의 시류에 휩쓸려 영화를 선택하기보다는 영화가 그 자체로 담고 있는 소재나 의미에 더 집중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반면 김대승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낮은 목소리>(감독 변영주, 1995)와 같이 여러 영화가 지속해서 역사를 기록하고 알려왔다. 그 희생과 성취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할 때 그 의미가 있다"면서도 "일본 내 국제예술제인 '아이치 트리엔날리 2019'에서 3일 만에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중단했던 일을 생각하면 교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때"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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