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발언대] 여성에 대한 억압을 '털'어버리자
[독자 발언대] 여성에 대한 억압을 '털'어버리자
  • 동아대학교 다우미디어센터
  • 승인 2019.11.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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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 픽션(감독 전계수, 2012)에는 주인공 주월(하정우 분)이 여자친구인 희진(공효진 분)의 수북한 겨드랑이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주월은 희진의 겨드랑이털을 보며 "어떻게 된 거야 이게?"라는 말을 뱉는다. 희진이 "어떻게 되긴, 겨드랑이털 처음 봐?"라고 반문하자 "이렇게 수많은 털은 처음이라 혼란스럽다"는 답변을 하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다음 대사는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더욱 정확히 보여준다. 희진의 "자기(주월)도 겨드랑이털 있잖아"라는 반박에 주월이 "남자랑 여자는 다르지"라고 답변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자의 '털'에 유독 예민하다. 어릴 적, 거울 앞에서 인중 제모를 하는 언니를 보며 "왜 털을 깎아?"라고 물어본 기억이 있다. 언니는 "여자는 털 있으면 안 돼"라고 간단히 답하며 다시 인중 제모에 열중했다. 여자는 털이 있으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언니는 인중에 수염이 자라면 질색을 하며 수염을 깎았고, 겨드랑이털이 완전히 제거된 여자 연예인을 보며 영구 제모를 결심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여자 연예인 중에는 눈에 띌 정도로 겨드랑이털을 기른 사람이 없다. 다들 맨살같이 말끔한 겨드랑이를 뽐낼 뿐이다.

지난달 막을 내린 부산국제영화제의 '커뮤니티 비프(Community BIFF)' 섹션에서는 털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상영했다. 그중 영화 면도(감독 정지혜, 2017)를 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털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가를 새삼 절실히 느꼈다. 극 중 소개팅에 나온 여성에게 수염이 있었다며 이를 조롱거리처럼 취급하는 김 대리(김종인 분)와 그런 그에게 동조하는 남성 직장동료들의 모습은 묘하게 어디선가 본 듯하다. 한편, 이와 같은 시선이 신경 쓰였던 주인공 민희(한혜지 분)가 혼자 면도를 하다 인중을 다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성의 털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 환경이 민희에게 없던 콤플렉스까지 만들어 씌운 것이다.

굳이 제모하지 않아도 될 털을 깎다가 상처를 입은 여성이 과연 민희뿐일까? 필자의 언니는 인중을 제모하다 자주 상처를 입어 이를 가리고 다니기 바빴고, 중학생 시절의 필자 또한 말끔한 겨드랑이를 얻기 위해 겨드랑이털을 제거하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적이 있다. 사회가 여성의 손에 불필요한 콤플렉스를 쥐여줬고, 미디어는 이 콤플렉스를 비판 없이 퍼 나르고 있다. 남성도 좋은 인상이나 위생을 위해 제모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남성이 수염을 깎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조롱하는 반응은 드물다. 오히려 남성 모델이 수염을 기르고 나왔을 때 그의 모습을 "스타일리쉬하다"고 칭찬하는 미디어의 반응은 어딘가 좀 불편하다.

여성에게 제모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여성의 말끔한 인중과 겨드랑이는 강요 아닌 강요가 돼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조리함은 미디어라는 확성기를 통해 사회 전체에 비판 없이 퍼져왔다. 사회는 미디어가 담고 있는 일부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제시하며 그들과 닮기를 강요했다. 여성에게 깔끔한 인중과 매끈한 겨드랑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사회는 여성의 자유를 옥죄던 모든 프레임을 거둬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털'어버려야 할 때다.

 이서진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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