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광주와 부산은 하나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와 부산은 하나였다
  • 박주현 기자
  • 승인 2020.05.1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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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장하윤 기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과거의 아픔도 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으로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40년 전,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으로 비롯된 깊은 상흔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쓰라린 존재로 남아 있다. 

5·18은 광주에서 일어났으며, 공권력은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부산도 5·18의 참상을 알리고 광주의 설움에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광주와 하나가 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18년의 유신독재가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국민에게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라'던 김재규의 유언과 달리, 다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화에 암운이 드리웠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듬해 3월, 개강을 맞은 대학가는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뜨거워진다.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를 외쳤던 1980년 '서울의 봄'은 5월 17일, 정권 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막을 내린다. 이에 신군부는 △언론검열 △대학 휴교 △정치 활동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날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가 투입된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폭력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전남대생들이 계엄령에 반발하며 벌인 시위에서 시작된 진압이, 점차 광주시민 전체를 향한 폭력으로 양상이 변해갔다. 동시에 '인간사냥'이라 불릴 만큼 계엄군의 폭력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심지어 총으로 시민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는다.

 

신군부에 철저히 은폐된 광주의 진실

신군부는 일반 시민으로 형성된 시위대를 '현실 불만 세력', '폭도', '불순분자'로 음해 및 왜곡 보도하도록 언론에 지시하고 이를 검열했다. 타지역 시민들은 광주의 상황이 정확히 어떠한지 인지할 수 없었다. 이에 차성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은 "신군부는 당시 광주를 무법천지라고 표현했다"며 "광주·전남지역 외 사람들은 거짓 보도에 호도되는 것이 대다수였다"라고 설명했다. 

언론은 5·18의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다. 당시 본지 기자였던 최형욱(독어독문학 '89 졸) 부산 동구청장은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본지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검열군인에게 승인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며 "'광주'나 '민주' 등이 금기어로 설정돼 5·18 기사를 쓸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그 당시 5·18에 관한 언론검열이 엄격하게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부산 지역지 <국제신문>은 보도검열을 저항한 바 있다. 당시 국제신문은 국내 언론 중에서 유일하게 광주 현장에 특별취재반을 파견했다. 취재반장 김양우 기자는 『시민군 계엄군』(김양우, 종로서적, 1996)에서 "내신기자라고는 국제신문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우쭐한 기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광주 현장 취재를 통해 작성한 기사가 검열로 많은 내용이 삭제됐다. 이에 그는 검열관을 속여 주간지 <주간국제>에 '5·18은 폭동이 아니다'는 내용과 폭도 대신 '무장 시위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기사를 실었다. 김양우 기자는 이에 대해 "(검열되지 않은) 원문대로 실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야 부산·경남 사람들이 5·18을 정확히 이해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부산도 침묵하지 않았다

광주가 고립된 채 공권력에 폭력을 당하고 있을 시기에, 부산에서는 청년들이 왜곡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대학 신종권(사학 '77 졸) 동문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선후배 6명과 함께 남포동에서 '5·18 시위는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행사', '5·18에 대한 보도는 거짓'이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살포한 뒤 시위를 펼칠 계획을 세웠다. 신종권 동문은 "당시 일본 방송을 통해 광주의 실상을 접할 수 있었다"며 "(신군부의 만행에 관해) 우리가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시위 모의 계기를 전했다. 그러나 시위가 얼마 남지 않을 무렵, 경찰에 발각돼 그는 자택에서 체포됐고 아울러 시위 역시 무산됐다. 당시 교사였던 신종권 동문은 계엄령 위반에 의한 구속으로 해직되는 신세였다.

또 다른 사례로 김재규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11명의 청년이 있었다. 이들은 5월 22일 즈음 부산의 중심가인 서면과 남포동 일대에서 5·18의 진상을 담은 유인물 살포에 성공했다. 김재규 전 이사장은 "서면에서 모여 시위를 진행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해당 위치에 군인들이 2-3m 간격으로 점거하고 장갑차가 배치돼있어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시위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유인물은 5·18의 진상이나 광주의 사상자들에 대한 정보를 싣고, 신군부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당시 함께 살포에 참여했던 박찬성 씨는 "군인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남녀가 커플로 위장해 유인물을 뿌렸다"며 "유인물을 건물 위에서 아래로 뿌리기도 하고, 버스 지붕 쪽 환기통에 전단 뭉치를 놓고 버스가 출발하면 살포되는 식으로 하기도 했다"고 알렸다. 그는 "나중에 듣기로는 우리가 소리·소문 없이 살포해 경찰과 군인이 진상을 파악할 길이 없어 당황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차성환 위원은 앞서 언급한 사건 외에도 부산지역의 5·18운동이 추가로 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저항은 은밀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건의 당사자가 체포되거나 재판을 받지 않는 경우 사건화가 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이 지금까지 묻혀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부산의 6월항쟁 성공은 5·18 덕"

진실은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파급력이 강하다. 5·18 역시 그랬다. 전두환 정권 중반기는 제적생을 복학 조치하거나 대학 내에 사복경찰을 철수하는 등 '유화 국면'이 조성된다. 완화된 사회 분위기는 5·18의 진실이 사진이나 영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계기가 됐고, 이는 1987년 6월 항쟁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 

각 대학 내에서도 5·18 추모 행사가 속속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 대학은 1985년 5월 16일 '광주항쟁 추모 기간'을 선포했다. 기간 동안 학내에서 학생들은 △상황극 △사진전 △초청 강연 등을 진행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획했던 최형욱 동문은 "광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진실이 엄폐되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5·18 진상을 학우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추모제를 기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제는 3-5천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며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학우들의 충격이 이어졌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추모 기간 도중, 다른 학생 간부들과 경찰에 체포돼 구류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이에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간부 체포에 대한 항의 시위를 펼친 바 있다. 

이듬해부터는 규모가 확대돼 '오월제'로 열렸다. 1986년 첫 오월제 동안 3백여 학생이 5·18 민중가요를 부르며 전투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등 시위가 계속됐다. 최형욱 동문은 "1985년 광주항쟁 추모 기간으로 광주의 진상을 접하게 된 학생들이 학내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월 항쟁까지 앞장서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며 "5·18은 시민의 희생에 대해 안타까움이나 분노도 있지만 (6월항쟁 주도 등) '586세대'의 집단적 각성이 됐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덧붙였다.

부산시민이 공개적으로 5·18 진상을 확인할 기회도 생겼다. 1987년 6월 8일에서 13일까지 6일간 부산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의거 사진전'이 개최된 것이다. 해당 사진전에서는 5·18 당시 사진과 영상물이 전시됐다. 이는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냈고 그 결과 6-8만 명의 시민이 이를 관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진전을 기획한 박승원 당시 송도성당 주임신부는 "시민들이 사진전을 보기 위해 줄을 섰는데 한번은 메리놀병원까지 줄을 선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가톨릭센터에서 메리놀병원의 거리는 약 400m에 달하는 거리다. 박승원 신부는 "시민들이 사진전을 보고 나서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보안사 사람들이 사진전을 보고는 '(5·18의 참상이) 이런 줄 몰랐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고 말했을 정도"라며 "이 사진전으로 시민들의 의식이 확 바뀌었다"고 전했다. 차성환 위원은 "부산의 6월항쟁이 전국에서 가장 치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사진전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묻혀있는 역사적 사실이 조명돼야"

차성환 위원은 "권력의 굉장한 탄압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부산은 저항했다. 광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대했다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며 "6월 민주항쟁이라는 전국적인 연대로 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며 의의를 알렸다. 김종기 민주공원 관장은 "여러 작은 사건, 개인적인 노력이 쌓여 일정한 시점에 가면 큰 정점으로 이뤄내듯, 5·18을 알리기 위한 활동가들의 이러한 노력이 6월항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대학 이화영(사회학 3) 학생은 "5.18 그 당시 부산에서 시위를 계획하거나 광주 진상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며 "부산시민으로서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에 무지했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또한 나를 비롯한 많은 이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의식하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다"고 표했다. 이지민(부산대 사회학 4) 씨 역시 부산의 5·18 역사를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이런 노력은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라며 "부산 5.18 운동을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알려져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이렇듯 부산에서의 5·18 관련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김종기 관장은 "부산지역 5·18 운동이 부산에서 일어난 자전적 운동이 아니었기에 부산지역 민주 운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며 "5·18에 비해 피해 규모가 적은 부마민주항쟁이  최근에 재조명되는 것처럼 부산의 5·18 운동도 역사적 진실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성환 위원은 "5·18이 광주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여러 도시에서도 5·18 운동이 있었는데 조명받지 못하며 잊히고 있는 현실"이라며 "부산 5·18 운동 같은 역사는 우리가 공유해야 할 거대한 자산이지만 이렇게 묻힌 채로 내버려 두면 참여자 개인만의 기억으로 흘러가 버릴 것"이라고 조명의 필요성을 밝혔다. 더불어 그는 "5·18 당시 외부와 단절된 채 국가에 의한 잔혹한 폭력을 경험한 광주시민에게는 아직도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다"며 "부산에서도 5·18의 비극을 알리고 함께 싸우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광주와 부산의 연대 의식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87년 6월 항쟁과 가톨릭 사회운동' (이동화, 2013)
'부산지역 5.18항쟁과 그 의의' (차성환, 2013)
'5.18항쟁과 부산의 민주화 운동' (차성환, 2015)
『부산민주운동사』(송기인 외 16명, '부산민주운동사 편찬위원회, 1998)


〈자료제공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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