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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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대학교 다우미디어센터
  • 승인 2020.09.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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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의 역사에서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다'라는 명제는 오랫동안 진리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 아니다'라는 명제도 진리라는 주장이 가능해졌다. '곧은 공간'을 전제로 설정한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굽은 공간'을 전제로 설정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후자가 참이기 때문이다.

통상 진리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어떤 명제가 진리일 경우 그것과 대립하는 명제는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다'와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 아니다'를 모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라는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옳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러한 명제의 가치를 표시하기에 적합한 용어가 마침 우리말에 있다. 일리(一理)가 그것이다. 흔히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대립하는 다른 사람의 말에도 똑같이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체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을 상반되게 평가하는 경우라면 그 평가들을 모두 용인하더라도 그 각각에 대해 일리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일리에 포함된 '이(理)'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혹은 '이치(理致)'는 객관적인 법칙이나 원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느낌이나 선호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다.

한편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다'라는 명제는 '공간은 곧다'라는 명제로부터 논리(論理, 말의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고,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공간은 굽었다'라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이것들은 논리라는 객관적인 이치에 따라 도출된 명제들이기 때문에 각각 일리 있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공간은 곧다'나 '공간은 굽었다'라는 명제는 그 진위를 객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것들은 하나의 이론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설정한 '가정'들이다. 사리(事理)를 분별하여 아는 이해력(理解力)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일반적으로 그 가정들에 근거한 이론 체계의 유의미성을 따져 그것들을 정당한 것으로 승인한다. '이해력에 기초한 승인'은 '객관적 타당성'을 나타내는 한 가지 형식이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하는 명제들이라 하더라도 각각 이러한 형식의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면 그것들 각각은 일리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일리 있다고 해야 할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거나, 무리(無理)한 것임에도 일리 있다거나 심지어 진리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식의 주장들은 독단(獨斷)의 전형이다. 독단은 각각 일리 있는 서로 다른 것들의 상호인정과 상호이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어떤 주장이 일리 있는 것인지 혹은 무리한 것인지를 치열하게 따져서 '일리의 진리화'와 '무리의 일리화 내지 진리화'를 경계할 수 있는 이해력을 성실하게 연마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긴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오용득(철학생명의료윤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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