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동아는 부마항쟁의 심장이었다 
민족동아는 부마항쟁의 심장이었다 
  • 홍성환 기자
  • 승인 2020.10.13 0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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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군부 독재의 시대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독재에 참다못한 시민들은 반기를 들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는 부산대 시위를 시작으로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과 함께 항쟁의 횃불이 피어올랐다. 

 

우리 대학교 학생들을 빼놓고 부마민주항쟁을 논할 수 없다. 이들이 있었기에 학생 시위로 시작했던 부마항쟁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 41주년을 맞은 지금, 당사자의 말을 통해 직접 민족동아의 투쟁을 돌아봤다. 

1979년 10월 17일 광복동 일대 시위 현장 <사진=정광삼 전 부산일보 기자> <제공=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979년 당시 유신체제의 폭정에 많은 국민이 분개했지만, 정권의 극심한 탄압에 분노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었다. 부마민주항쟁 동아대 시위의 주역 김백수(법학 '82 졸) 동문은 "박정희 정권 당시 전국 대학생들의 마음속에는 유신독재에 맞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겠나"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YH무역 농성 사건'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유신정권이 당시 부산·경남의 맹주였던 김영삼 총재를 탄압하자 지역민들은 격노했다. 김백수 동문은 "당시 부산 지역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고 부산에서 국회의원 6선을 할 정도로 지지를 받았던 김영삼이 제명당하자 부산 시민들의 마음에 저항 정신이 끓어올랐다"고 설명했다.


항쟁의 불쏘시개, 10월 16일 


1979년 10월 16일, 먼저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정권을 향한 투쟁의 대오를 갖췄다. 부산대 학생 정광민 씨를 필두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학내 시위를 시작했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치며 촉발된 학내 시위는 점차 부산 중심가였던 광복동과 남포동 거리 한가운데로 퍼져나갔다. 시위 주도는 부산대 학생들이 했지만, 우리 대학이 시내와 밀접했기에 동아대 학생들도 뛰쳐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는 시민들의 격렬한 환호와 전례 없는 지지를 받았다. 당시 본지 기자였던 최형욱(독어독문학 '89 졸) 부산 동구청장은 그날 오후 국제신문사에 학보 조판일을 하러 나서던 길이었다. 최형욱 동문은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해 손뼉을 치고, 도움도 주며 학생을 진압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모두가 시위에 공감하고 함께해 16일 시위는 투쟁과 동시에 축제 분위기였다"고 묘사했다. 더불어 "당일 낮에는 대학생 위주였던 시위가 밤에는 직장인,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 위주로 시위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김백수 동문은 "나라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던 차 부산대가 시위를 펼쳤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환호하며 곧장 시위에 참여하러 거리로 나갔다"고 회술했다.


본격적인 민중항쟁으로, 10월 17일

<일러스트레이션=임효원 기자>

 

다음날 17일에는 부산대의 횃불을 동아대가 이어받았다. 16일 시위상황을 인지한 우리 대학 법학과 학생 여럿이 즉석 토론을 거친 뒤 부산대 시위에 동조하고 오전 10시부터 학내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동관(법학 '81 졸), 김백수 동문을 중심으로 한 일행은 시위 전 학생들을 도서관 앞으로 불러 모았다. 김백수 동문은 "법학과 학생을 필두로 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학생들이 도서관 앞에 차츰 집합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들은 20-30여 명의 학생뿐이었지만 오전 이후 10배가량불어났다. 이렇게 모인 학생은 우리 대학 구덕캠퍼스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시국을 논하며 연좌 농성을 벌였다. 

학내 시위의 규모는 점차 커졌다. 오후 1시경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교련 수업을 하는 학생 100여 명과 합류하게 되면서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나 정문을 통해 교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문 앞 전투경찰 진압으로 교내로 다시 퇴각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도서관 앞과 운동장을 오가며 교내에서 시위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대로는 외부 진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시위대는 저녁 6시 남포동에서 집결하자며 뿔뿔이 흩어졌다. 

<일러스트레이션=임효원 기자>

흩어졌던 시위대는 저녁 6시가 되자 남포동 부영극장 앞(현 BIFF 광장)으로 결집했다. 김백수 동문은 "17일 날 남포동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며 "오후 6시가 되니 광장에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시위대가 부산극장 앞길도 가득 메웠다"고 회상했다. 시위 초반에는 학생들이 전투경찰과 대립하다가 밀리면 골목으로 도망가고 다시 집결하는 게릴라식 시위였다. 밤이 깊어지니 퇴근하는 시민들도 가세해 시위에 화력을 더했다. 마침내 경찰 진압대는 불어나는 시위대의 기세에 이들을 막아서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부마항쟁이 학생 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백수 동문은 "16일 시민은 물론 다른 대학 학생들은 유신철폐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이후 언론 보도와 구전을 통해 소식이 퍼지자 17일에는 우리 대학뿐만 아니라 고신대, 경성대, 수산대(현 부경대) 학생들도 남포동 행렬에 동참했다. 고등학생이나 일반 시민도 저녁 늦게 유신 철폐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 수가 급격히 불어나자 진압대를 규모로 밀어버리고 대로를 점령했다"며 "우리는 대로를 통해 시청(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을 거쳐 부산역 방향으로 전진했다. 일부 대열은 자갈치시장으로 향해 남포 파출소를 방화하기도 했고 또 다른 시위대는 대신동으로 행진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남포동과 광복동을 비롯한 중구 일대는 시위대로 가득 차 참여 인원 추산이 어려울 정도였다. 또한, 전날 시위와는 달리 17일 시위의 확산은 중구에서 동구, 부산진구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분노한 시위대는 파출소, 방송국, 신문사를 습격하고 진압하는 경찰과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하지만 격정적이었던 항쟁은 18일 0시를 기점으로 선포된 부산 지역 계엄령과 이어진 군·경의 진압으로 오전 1시경 완전히 종료됐다.

 


"다시 돌아가도 항쟁에 앞장설 것"


항쟁이 끝난 후 경찰에 체포된 주동자와 참여자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인생의 굴곡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백수 동문은 "시위를 마치고 귀가했더니 이미 형사들이 집을 뒤진 후였다"며 "체포될 우려에 그대로 외갓집으로 피신을 해 2-3일간 숨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계엄령 선포 후 우리 학과 교수가 '문제를 잘 해결했으니 며칠만 구금되면 된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교수와 면담하러 부산에 돌아왔다"며 "약속 장소에 가니 형사들이 나를 체포했다. 아마 형사들이 나를 계획적으로 유인한 게 아닐까"라고 그 때의 심정을 말했다.

서부경찰서로 연행된 김백수 동문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형사들이 '공범이 누구인지 자백하라'며 나를 발가벗겨 공중에 매단 상태에서 얼굴에 수건을 덮어 물고문하고 발길질했다. 그렇게 꼬박 3-4일을 재우지 않고 고문했다"고 회고했다.

유신정권은 부마민주항쟁을 시민이 주도한 항거가 아닌 간첩이 선동한 폭동 혹은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주도한 국가 내란으로 몰아갔다. 김백수 동문 역시 간첩 취급을 받다 겨우 누명에서 벗어났다. 그는 시위 주동자로 재판에 회부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6개월의 수감생활을 보냈다. 

김백수 동문은 "출소하니 어머니께서 '야 이놈아, 살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정말)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했다. 항쟁 주역이 치른 대가는 고문과 수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출소 뒤 복학하니 학교생활이 어려웠다. 늘 사복경찰이 미행했으며 학생과는 취직에 훼방을 놓았다"고 말했다. 또한, "고문 후유증이 남았다. 고문 장소가 덥고 어두웠는데, 이와 비슷한 곳에 가면 마음이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투쟁 이후 험난한 삶에 시위 참여자들은 가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옳은 일을 했으며 바른 사회를 위해 공헌했다는 자긍심이 후회보다 더 크다. 김백수 동문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평범하게 공부를 했으면 삶이 평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이 있었기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러한 역사의 한순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맞서 싸울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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