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부산 전차가 있었다
'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부산 전차가 있었다
  • 박주현 선임기자
  • 승인 2021.10.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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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관통했던 부산 전차
일본인 편리를 위해 만들어져…조선인을 향한 차별까지
대표적 교통수단 됐으나 자동차·버스에 밀려 뒤안길로
1910년대 후반 충무동 입구, 부산 전차가 보인다. 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1910년대 후반 서구 토성동 조선와사전기(주)(현 한국전력 중부산지사) 앞. 부산 전차가 보인다.
<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1915년 10월 31일, 부산 전차 첫 개통(동래선(부산진-온천장))은 부산 근대화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통해 부산의 시간은 압축될 수 있었다. '쇠막대기로 전기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로 불렸던 부산 전차는 대표적인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1968년 철거되기까지 53년간 부산을 수놓았다. 


전차는 전주나 전등으로부터 동력을 받아 일반도로면 일정 궤도 위를 달리는 도시 교통 수단이다. 당시 전차는 시속 20km 정도의 속력이었다. 1899년 서울에 처음 개통되면서 우리나라 전차의 역사가 시작됐고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전차가 생긴 것이다. 


동래선 전차 개통 다음으로 △1916년 대청정선(부산역-부산우체국-대청동-보수동-부평시장-토성동) △1917년 장수통선(부산우체국-광복동-토성동)이 개통됐다. 시내 일주 순환선이 마련된 것이다. 표용수 전 부산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은 저서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표용수, 선인, 2009)에서 "교외선(동래선)과 연계됨으로써 전차가 시민의 발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 결과를 '근대 부산의 교통 발달과 기록-기차와 전차를 중심'(김동철, 2011) 논문 통해 살펴보면, 1919년 당시 부산 인구가 7만 4,138명이었으나 당해 부산 전차 승차 인원은 251만 4,655명이었다(동래지역 통계 제외). 이는 당해 인당 평균 약 33번 전차를 탔다는 것이다. 


'일본인'을 위한 '부산' 전차
부산 전차의 배경에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을 향한 수탈과 차별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반이었던 동래선 개통 당시 부산 전차 건설은 지역민 교통편의 측면보단, 일본인 휴양지였던 온천욕장 증대를 위한 경제적 측면이 강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우리 대학교 전성현(사학) 교수는 노선에 부산진·동래 조선인 마을까지 포함한 것에 대해 논문에서는 "장기적으로 조선인 마을을 일본인 중심의 영향권 안으로 포섭하여 공간별로 위계화하는 구심력도 강했다. 또한, 부산 내륙으로 확장되는 전차 노선을 연이어 계획했다. 부산항을 기반으로 한 일본인들의 영향력을 내륙으로 확대하는 원심력도 강했다"고 설명했다. 


궤도 부설 시기부터 일제의 수탈이 있었다. 조선인 마을인 동래지역에 궤도 부설을 위해 공익사업을 명목 삼아 1평(3.3㎡)당 30전 이상 사유지를 평당 15전으로 강매하고 이를 거부할 시 경찰서에 구금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래 노선과 시내 노선 요금 차이에 따른 차별도 있었다. 부산발 부산-동래 운임 할인은 있었지만, 동래발 동래-부산 운임 할인은 없었다. 동시에 시내 노선과 같은 거리일지라도 동래 노선은 운임을 더 높게 책정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부산 전차 노선도 제공=부산박물관
▲일제 강점기 당시 부산 전차 노선도 <제공=부산박물관>


전차와 얽힌 조선인의 저항
1916년 부산진 조선인 마을 앞 영가대(동구 부산진성 공원 내 정자) 근처에서 조선인들이 전차에 치였다. 그중 한 명은 즉사했다. 현장 주변으로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군중 가운데 한 명이 "저 전차가 사람을 치어 죽였다"라고 말하자 더 많은 조선인이 운집해 일제히 돌을 던지며 결국 전차를 전복시켰다. 사고 수습을 위해 경찰관을 태운 다른 전차 역시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조선인들에 의해 전복됐다. 


'일제시기 지역철도 연구-근대 식민도시 부산의 전철 건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역학관계'(전성현, 2012) 논문에 따르면, 위 같은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일본인 언론과 경찰 및 검찰 등은 조선인들은 '원래 부화뇌동(附和雷同)'을 잘하고, '폭동을 재미로 일삼'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죽임당한 조선인을 향해 '조선인 특유의 느긋함에 선로에서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책임 전가했다. 


1918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영가대 언덕길에서 전차가 조선인을 치었다. 그 조선인은 바로 즉사했으며 일본인 기관사는 전차를 몰아 달아나 버린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회사 측은 사고를 모르쇠로 일관하자, 분노한 민중들은 전차로 몰려갔다. 그들은 전차를 밧줄로 묶어 언덕 아래로 당겨 굴러떨어지게 했다. 


전성현 교수는 "봉기는 우발적이긴 했지만 잠재된 불만의 표현이었다"라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이러한 사건은 조선인들의 식민권력·식민정책을 향한 저항"이었다며 평가했다.


조선인들은 '전차임인하운동'을 펼치면서 전차 운영사를 대상으로 요금 인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인 중심의 부산부민 주도로 전개하는 '전차임균일제운동(시내선 구간 및 요금제 균일요구)'·'전차부영화운동(부산부 전차운영사 매입 요구)'과 연대하기도 했다. 


교외선은 개통 당시 3구간 12전이었으며 1921년 4구간 20전으로 요금이 증액됐다. 전 교수에 의하면 해당 요금은 '세계 유례가 없는 비싼 요금'이었다. 그러자 반발한 동래 조선인은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운임할인규정의 지역적 차별 문제 제기, 왕복 승차권 할인 등을 주장했다. 이어 1926년에는 동래-부산 간 전차 구간 및 요금제 개정 등을 요구하면서, 동래지역민 1,900명이 연서했다. 1931년에도 2구간 10전으로 개정을 요구하는 서류를 운영사에 제출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도 소득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러 전차 운동의 결실은 일본인 중심 시내 지역 위주로 돌아간 것이다.


전차 타고파 돈 모으던 추억도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을 위했던 부산 전차는 명실상부한 부산시민의 발로서 자리매김했다. 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 유입에 따라 부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통계청에 의하면, 부산 인구는 1949년 47만 명에 불과했지만 1955년 105만 명을 기록했다. 이에 대중교통 수요 증가는 부산 전차 이용객 증가로 이어졌다. 


본지 기자 출신인 배형우(국어국문학 '73 졸)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부산 전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배 동문은 "중학교 시절에는 1964년 졸업 때까지 영도구 남항동 종점에서 중구 부용동까지 전차로 통학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과 동래온천에 목욕하러 갈 때나 봄에는 벚꽃 구경과 온천천 주변 딸기밭 갈 때 전차를 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서구 아미동에 거주하는 김승춘 씨 역시 부산 전차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전차가 정전되면 가다가도 멈추고, 정전이 풀리면 출발했다"면서 "전차가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때는 출퇴근 때는 전차에 사람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했다. 손잡이 잡으면 최고였고, 앉으면 더 최고였다"라고 말했다.

 

현재 공사 중인 우리 대학 부민캠퍼스 부산 전차 사진=박주현 기자
▲현재 공사 중인 우리 대학 부민캠퍼스 부산 전차 <사진=박주현 기자>


노후화·적자에 쓸쓸히 퇴장
그러나 1959년에 들어서면서 부산 전차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시내 도로가 좁아 전차운행이 되레 교통난을 야기한 것이다. 1963년에는 도로확장으로 전차는 대표적 대중교통 자리를 버스나 택시에 내줘야 했다.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표용수, 선인, 2009)에 따르면 '전차 운행이 폐지되기 2년 전 1966년도 부산시 인구는 142만 6,019명이었다. 그중 1일 평균 전차를 이용하는 인구는 14만 9,335명으로 전체 인구 10%에 그치고 있어 부산 전차 적자 누적액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전차궤도가 너무 낡아서 간선도로 유지상 그대로 둘 수 없'(국제신보, 1959.01.22.)을 정도로 전차 노후화가 심각했다. 이러한 문제로 부산 전차는 결국 1968년 5월 19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전면 폐지됐다. 배형우 동문은 "당시 선로 철거 공사로 파헤쳐 놓은 도로가 생각난다"며 "우리 삶의 한 자락이 추억의 창고 안에 저장됐다"고 소회를 전했다.


부산 전차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 대학교 부민캠퍼스 법학전문대학원 주차장에 위치한 부산 전차(등록문화재 제494호) 관람을 통해 전차가 달렸던 당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운행하던 전차로, 1952년 무상원조 받아 부산 전차로 활용됐으며 부산 전차중 유일하게 남아 2012년부터 1만여 명 관람객에게 그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나 전차 손상 문제로 전시가 중단됐으며, 2019년부터 보존 공사 중이다. 마지막 단계인 보호각 공사를 마치면 내년 상반기에는 부산 전차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우리 대학 배지원(행정학 4) 학생은 "부산 전차가 우리 대학 부민캠퍼스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매일 그 옆을 지나다녔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사가 끝나면 한번 찾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강민지 (인제대 공공인재학부 4) 씨는 "부산 토박이이지만, 부산에 전차가 있었단 사실을 몰랐다. 매체에서만 보던 전차가 부산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며 "부산 전차가 더 홍보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대학 석당박물관 박창열 학예연구사는 해당 문화재에 관해 "피란수도 당시 사용됐던 전차로서 부민동 피란수도 유산과 연계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며, 관람객에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박주현 선임기자
1906866@donga.ac.kr

<참고문헌>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표용수, 선인, 2009)
'근대 부산의 교통 발달과 기록-기차와 전차를 중심'(김동철, 2011)
'일제시기 지역철도 연구-근대 식민도시 부산의 전철 건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역학관계'(전성현, 2012)
'일제시기 부산의 전차 운영을 둘러싼 지역운동과 힘의 역학관계'(전성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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