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동아 캠퍼스 라이프
그때 그 시절, 동아 캠퍼스 라이프
  • 동아대학교 다우미디어센터
  • 승인 2021.11.0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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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우리 대학교는 개교 75주년을 맞이했다. 75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동아인의 발자취가 남겨졌고, 지금도 남겨지고 있다. 같은 공간 속 서로의 기억이 다르듯이 같은 대학이지만 선배와 후배가 기억하는 대학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그때 그 시절 동아인의 기억 한구석에 자리 잡은 대학시절은 어땠으며, 우리는 지금 대학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학가는 얼어붙었다. 수업은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학우 간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이른바 코로나 학번은 축제를 즐겨본 경험이 없다. 매년 변화하는 대학 문화의 시작과 과거의 대학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후배 동아인 △노정현(경영학 2) △박혜정(사회학 1) 학생이 선배 동아인들 △박승환(전기공학 '93 졸)(이하 박) △허운주(일어일문학 '95 졸)(이하 허) △김희돈(정치외교학 '96 졸)(이하 김) △김성원(사회복지학 '20 졸)(이하 성)에게 물어봤다.

<일러스트레이션=정영림 기자>

 

- 박혜정: 선배님의 재학시절 캠퍼스 라이프와 지금 캠퍼스 라이프의 차이는 무엇인지.
김: 거시적으로 보면 당시 민주화 요구, 사회 변혁 운동을 이끄는 구심으로서의 캠퍼스 기능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명감, 선민의식이 있었다. 지금은 극단적이지만 개인의 생존을 위한 훈련소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허: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91년도는 자기표현을 강조하는 이른바   X세대가 주류를 이뤘고, 현재 MZ세대는 자기주장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문화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한다.
성: 코로나19로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재학 당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경험이나 기회를 접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위드 코로나가 시행되더라도 이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으며, 20대 초반에만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와 경험이 줄어든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노정현: 재학 당시, 유행곡이나 유행어는 어떤 게 있었는지.
김: 유행곡은 가수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1991)가 있고, KBS2 <유머 일번지>(1983)에서 개그맨 김형곤의 '잘 돼야 될 텐데'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또 90년대 유행하는 개그 시리즈로 사오정 시리즈도 있었다.
허: 당시 유행하던 가수는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노래 중에서는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유행했었다. 그리고 졸업할 즈음 안치환과 윤도현의 노래처럼 교훈적이고 건설적인 노래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박: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과 △이선희 △변진섭 △이문세 등 쟁쟁한 가수들이 많았다.
성: 한창 벚꽃엔딩과 썸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다. 그리고 재학할 때 즈음 다양한 아이돌이 등장하며 지금 아이돌 문화의 초석이 되던 시기였다.


- 노정현: 당시 유행하던 옷 스타일이나 패션 트렌드는 무엇이었는지.
허: 여자 학우들 사이에서는 긴 생머리와 체크무늬 와이드, 그리고 어깨 정장이 유행했었다. 
박: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범하게 입었지만 예비역들은 군복 물들여서 입거나, 교련복을 입고 다녔던 게 기억난다.


- 박혜정: 그 시기의 캠퍼스 전경과 지금의 캠퍼스 전경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김: 당시 구덕캠퍼스(이하 구덕캠)는 대학병원이 들어선 직후였고 △예술대 △법대 △사회대 등이 공존했다. 그리고 병원 후문에서 캠퍼스 정원으로 이어지는 경사 길과 정원 사이사이에 놓인 벤치에서 여유와 낭만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예술대 쪽은 항상 조각 작품을 만드는 학생들의 그라인더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 근처 대신공원은 휴식과 산책을 하기 좋았다. 현재는 캠퍼스 전역이 의료타운으로 바뀌어 그때의 낭만은 찾을 수 없어 아쉽게 생각한다.
박: (승학캠퍼스가) 많이 바뀌었다. 주변에 아파트도 생기고, 캠퍼스 내 건물도 많이 들어섰고, 가장 큰 변화는 대 운동장이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운동장이었다.
성: 사회대 소속이라 부민캠퍼스(이하 부민캠)를 다녔는데, 당시는 농구 골대가 사회대 로비에서 조금 나오면 있는 계단 바로 인근에 있었지만, 불과 몇 년 전에 건물 뒷편으로 옮겨졌다. 보통 약속을 잡을 때 '농구 골대 앞에서 보자'는 말을 많이 했었기에 농구 골대 이전이 아쉽다.


- 노정현: 당시 대학로 주변에 자주 갔거나 아직도 기억나는 음식점이나 술집이 있는지.
김: 술집은 거목과 경양식을 파는 초원의 집이 기억난다.
허: 주변 음식점이나 술집의 이름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고 주로 학교에서 많이 마셨다. 그리고 학교에서 자장면이나 짬뽕을 배달시켜 국물과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이외에는 승학캠퍼스(이하 승학캠)의 뒷길과 과방에서도 많이 마셨다. 
박: 승학캠 정문 앞에 일미식당이라는 정식 집에 자주 갔다. 또 에덴 공원 근처 학사주점과 지금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곳에 낭만적인 술집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성: 부민캠 주변의 △대폿집 △튀김대학     △닭다리잡고 맴맴이라는 술집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대폿집은 아직도 종종 학교 인근에 오면 찾는다. 진하게 취했던 추억이 깃든 가게라 갈 때마다 왠지 더 취하는 것 같다. 대학 추억의 장소인 대폿집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박혜정: 학과 학생들끼리 미팅하는 소위 '과팅'은 아직도 성행한다. 당시의 과팅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김: 과팅은 하지 않았지만 연합 동문회를 통해 부산여대(현 신라대) 학생들과 동문모임을 했었다. 부산여대 부근(현 연제구청 부근)에서 모임이 있을 때, 쭈뼛거리며 캠퍼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허: 당시는 과팅이라는 문화가 없었고 미팅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미팅은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모르겠다.
박: 과팅은 많았다. 특히 전기공학과는 여학생이 한명도 없어서 더욱이 많았고, 당시 △가정관리학과 △식품영양학과 △의류학과 등이 인기 학과였고, 간호학과하고도 과팅이 있었다. 또 소위 요즘 유행하는 말로 '깐부'와 과팅에서 만난 한 여학생을 흠모하는 그런 분위기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89학년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 노정현: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동제가 취업 박람회나 강연 같이 온·오프라인 혼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예전 대동제와는 사뭇 다른데, 과거 축제는 어떤 이미지였고, 어떤 분위기였는지. 또 축제 관련한 재밌는 에피소드도 궁금하다.
김: 당시 대동제는 축제와 투쟁을 병행했다. △대중가수 초청 공연 △풍물패·노래패 공연 △동아리 연합회 행사 △총 학생회 주최 투쟁 출정식 등이 진행됐다. 축제기간에는 학과나 단대, 동아리 주점에서 시국 토론회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당시 축제 때는 전대협 등 전국 규모 대학생 단체 대표가 방문하기도 했는데, 1990년에는 당시 전대협 의장 송갑석(현 광주 서구갑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하 송 의장)이 깜짝 등장했다. 송 의장은 사수대(근접 경호원)와 같이 움직였는데, 쇠파이프를 든 사수대가 송 의장을 에워싸고 등장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당시 송 의장은 승학캠 학생회관 3층에 있던 영자신문사(현 학생상담센터)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 또 한 해는 축제 기간 이벤트로 교내에서 당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북한영화상영회를 했는데,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학교를 침탈해 중앙도서관까지 밀렸던 기억도 있다.
허: 당시의 축제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화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학생회의 주류를 이뤘기에 단연 재미도 있었고 곧 다가올 선거를 이어가는 다양한 행사 분위기가 갖춰져 있었다. 또 그때는 각 학과별 동아리별로 시행하는 주점이 대세였으며 사실 서울에서 유명한 가수가 내려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또 TV에서 진행하던 운동 프로그램을 재현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박: 축제가 1년에 한 번씩 개최됐기 때문에 한 학교의 축제가 아니라 부산지역 전체 대학생들의 축제의 의미를 가졌다. 축제는 과별, 동아리별로 학사주점을 운영했고, 축제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매번 학교 잔디밭에서 아침을 맞았다는 슬픈 기억이 있다.
성: 재학하던 시기의 축제는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았던 분위기였다. 유명한 가수와 연예인들이 참여하고, 행사 일정에 맞춰서 노는 것도 좋았다. 보통 승학캠에서만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부민캠을 비롯한 타 캠퍼스는 놀 거리가 크게 없어서 승학캠까지 가서 놀아야 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다. 하지만 승학캠이 멀기도 해 공연을 본적은 없었으며 특히 부민캠은 지역주민들도 오셔서 사람이 많이 몰렸었다. 그리고 새내기일 때 과별 주점을 운영했었는데 술도 많이 먹고 초면의 학생들과 친해졌던 추억이 있다. 최근에는 주류 판매가 금지됐는데 축제임에도 술을 먹지 못해 화났던 기억이 있다. 


- 박혜정: 지금 우리 대학은 코로나19로 MT가 일절 근절돼 경험해보지 못했다. 당시의 MT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김: 첫 MT는 입학식 전 학과, 학생회 주최로 신입생환영회 형식의 1박 2일 행사였다. 이후 영자신문사에 들어가면서 1년에 두 차례 신문사 MT를 가게 됐다. 신문사 MT는 간사 선생님 포함 10명 내외의 인원이 울릉도나 제주도로 갔다. MT이지만 신문사에서 갔었기에 요즘으로 치면 여흥과 업무가 함께하는 세미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허: 과거의 MT는 과 단위로 진행됐으며 재밌게 놀기도 했지만 진보적인 토론도 진행해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학과 단위의 동아리 활동도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 당시 MT는 과별 단대별 대학생의 필수코스였고 당연히 가야하는 걸로 인식됐다. 주로 지리산이나 청도, 영남 알프스 쪽으로 많이 갔다.
성: MT는 늘 송정으로 갔다. 이른바 '신복편전'이라는 이름의 △신입생 △복학생 △편입생 △전과생 모두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부분 신입생들은 거의 참여했었고, 정말 만취할 때까지 즐겼던 기억이 난다. 보통 1학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전에 갔었는데, 단체 피구를 비롯한 야외 게임을 즐기고 실내에서도 여러 게임을 진행했다. 행사를 좋아하는 학생들 중에는 한 학기에 6회나 엠티를 가는 경우도 종종 봤다.


- 노정현: MT하면 술과 연애를 빼놓을 수 없다고 들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허: 이름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바바리코트를 입은 동기가 양주만 먹는다하며 소주랑 비슷한 가격의 캡틴큐라는 양주를 가져와 해당 술로 양주를 처음 입문해봤던 기억이 있다.
박: 연애는 안 했지만 신발에 맥주 부어서 마셨던 나쁜 전통은 있었다. 아마 지금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80-90년대 연구회 모습

 


- 박혜정: 지금은 동아리로 통합됐지만 과거 '주 4일은 술을 마신다'는 주사파와 같은 지하써클이 존재했다고 들었다. 지하 써클이 실존했다는 게 사실인지.
허: 재학하던 시기는 군부 독재 시대고 분단국가다 보니 실제로 다양한 정치사상을 실험하던 동아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 대학에서도 애국군인 사건이나 간첩단 사건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건전한 역사 동아리나 학생회 간부들도 여럿 잡혀갔다. 그들도 잡혀가던 시대였으니 공개적인 동아리도 이른바 지하 써클이라고 이름 붙인 것 같다. 
박: 지하 써클은 당연히 있었다. 일종의 운동권 소모임으로 존재했다. 동아리가 대중적인 모임이라면 지하 써클은 점조직이었다. 신입생도 철저하게 개인별로 접촉해서 포섭하고 아마 다들 가명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 노정현: 당시 인기 있는 동아리는 무엇인지.
김: 대학생활과 영어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타임반이 인기 있었다.
박: 당연 학보사가 최고의 인기 동아리였고, 방송반과 영자신문이 학보사와 같이 인기였다.
성: 재학 시기 음악 동아리나 여행 동아리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무래도 학교 행사에서 주인공이 되는 모습이나 여행 그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졸업 시기에는 흔히 스펙에 도움 될 만한 동아리들이 인기가 많았다. 


- 박혜정: 현재 동아대 수강신청은 선착순인 다른 학교와 달리 장바구니에 담아 학교에서 확정과 탈락을 정해 주는 형식이다. 선배님들이 재학하셨을 당시 수강신청 방식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 조교가 있는 학과사무실에 직접 가서 개별적으로 수강신청 했다.
박: 전공과목은 당연히 수강하는 것이고, 교양과목이나 타과 수업은 선착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노정현: 현재 우리 대학은 최대 수강 학점 19학점(일부 단대는 예외)에 토대교양, 중점교양 등 여러 교과목 커리큘럼이 존재한다. 선배님의 재학 당시 특이했던 교과목 커리큘럼이 있다면.
허: 우리 대학은 91학번부터 진보적 과목들이 점차 등장했다. 당시 재학하던 인문대의 경우 △여성과 사회 △한국 근현대사 △현대 사회와 철학 등 독일 대표 사회주의 철학자 맑스와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는 과목이 개설됐다.


- 박혜정: 학점을 잘 받을 수 있거나, '이성과 데이트하는 과제'와 같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과목을 '꿀교양' 혹은 '꿀과목'이라고 한다. 선배님들께서 재학하셨을 당시의 꿀과목이 있었다면 어떤 과목인지.
김: 당시 교육학과 설기문 교수의 강의가 구덕캠에서도 원정 수강을 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일러스트레이션=정영림 기자>

 


- 노정현: 현재 우리 대학의 위상이 예전만큼 높지 않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많다. 매년 입결도 떨어지는 추세라 이런 인식이 만연한데, 과거 동아대의 위상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 과거 우리 대학은 소위 인서울 3국 대학(건국, 단국, 동국)에 가느니 동아대 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강 이남의 최고 사학이라 생각해왔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않았다. 그럼에도 현재 위상이 떨어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등록금 문제로 국립대가 이른바 대세가 되며 위상이 떨어지고 '지잡대 이데올로기'가 지방대의 위상을 한 번 더 떨어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꿈과 진로를 설정할 수 있으니 후배들은 포기하지 말고 다독하고 여행도 많이 떠나보고 열정적인 탐구정신을 갖길 바란다.
박: 선배로써 매우 안타깝다. 과거에는 부산대 다음 위상을 가진 학교였고, 타 지역도 우리 대학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다.


- 박혜정: 우리 대학이 과거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김: 재단부터 학교를 어떻게 규정하고 운영해야 하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비롯한 학생회는 학교에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
허: 이전 답변에 덧붙여서 재단은 학생에 대한 투자와 좋은 교수진 선발에 힘쓰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박: 많은 문제가 있지만 최우선적으로 재단이 변화를 해야 한다. 사립대는 특히 재단에서 많은 권한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단이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성: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학내 민주화를 비롯해서 더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학생과 교직원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실현될 수 있는 곳으로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학교를 운영하는 법인에게 절대적인 결정권이 있어 학내에 여러 문제가 생겨도 풀어나가기 어려운 상황으로 알고 있다. 학교의 주인은 학교 구성원인 점을 운영하고 있는 법인이 인지하고 행동한다면 위상도 금방 회복될 것이다.


- 노정현: 이른바 코로나 학번이라고 불리는 20, 21학번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등록금이 아깝지 않게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라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동아대학교라는 △조직 △울타리 △제도 등 캠퍼스 구석구석에 따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널려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살펴보고, 물어보고, 탐구해서 성장 에너지로 맘껏 섭취했으면 좋겠다.
허: 시대는 언제나 변화한다. 코로나19 시국이기에 줌과 같은 온라인 수업이어서, 학교를 못 가서 등 많은 이유가 당신들의 학번을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 코드가 될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 말고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길 바란다. 
박: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남들보다 조금 뒤쳐진다고 조급해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라. 그리고 조금씩 그 방향을 실천에 옮기길 바란다. 남들보다 잘 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본인을 들여다보면 삶이 그렇게 팍팍하진 않을 것이다. 항상 후배들을 응원한다.
성: 코로나19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막고 대학생활에서 꿈 꿨던 여러 시도들을 막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꿈 조차는 막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일상을 회복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여러분들 속에 뚜렷하게 있는 것들 무엇이든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 코로나로 억눌렸던 다양한 생각과 시도들을 앞으로 펼치길 기대한다.

 
박서현·박혜정·조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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