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의 뻔뻔스러움
[철학+]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의 뻔뻔스러움
  • 장소영
  • 승인 2010.05.1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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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09년 09월 10일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쪼개서 일정한 규격의 단위로 만들면 무엇이든 상품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굳이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이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력은 시계에 의해 시간적인 단위로 측정된다. 인간 자체를 노동력의 잠재적인 적분 총량으로 본다면, 노동력을 시간적인 단위로 쪼개어 상품으로 거래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쪼개어 상품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실제로 물리적인 칼로 쇠고기를 쪼개듯이 직접 쪼개면 노동력은 아예 없어진다. 실제로는 시간으로써 인간의 몸을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쪼개어 거래하는 데도, 가시적으로는 마치 인간 자체가 거래되는 것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만들어내어 유지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다. 가시적인 영역은 착각의 영역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은 실제의 영역인 셈이다. 가시적인 영역을 알리바이로 활용하여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근원적인 힘을 지배 ? 장악하는 것이 자본주의적인 운영 방식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운영 방식이 가장 크게 문제를 일으키는 영역은 담론의 영역이다.예컨대 가시적인 착각의 수준에서 보면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개인인데, 비가시적인 진실의 거래 수준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예속된 도구에 불과하다. 자유는 착각이고, 예속은 실제인 셈이다. 이럴 경우, 자유로운 개인적 주체성을 찬양하는 담론은 실제의 예속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 '자유'라는 낱말에는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실제의 예속을 부추기는 역설이 발생하면서 애매성이 넘쳐나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알리바이와 같은 성격을 띤 담론 체계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학문적인 개념이다. 사람들은 비가시적인 실제의 영역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회 전체의 지배 ? 장악의 구도 속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목격하여 확인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대개 그렇게 확인하여 사실로 드러나는 자신의 예속성을 좀처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착각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자발성에 의거해서 유지되고 강화되는 셈이다.

착각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의식 상태를 허위의식이라고 한다. 자신이 허위의식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의 의식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짐짓 가장된 거짓 의식이다. 거짓 의식이 발각될 때에는 대체로 얼굴이 붉어지지만, 허위의식이 발각될 때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허위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데올로기는 때때로 진실보다 더욱 더 확신에 찬 형세를 취한다. 그 바깥에서 보면, 너무나도 '뻔뻔스럽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도 뻔뻔스럽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들도 뻔뻔스럽고, 경제 살리기에 관한 이야기들도 뻔뻔스럽다. 안전한 미국 쇠고기 이야기는 더욱 뻔뻔스럽고, 언필칭 '강부자' 정부가 서민 생활의 향상을 운위하는 것은 더더욱 뻔뻔스럽고, 청계천 콘크리트를 몇 백 배 확장하여 대운하 콘크리트를 만들겠다는 고집은 극단적으로 뻔뻔스럽다. 뻔뻔스러움에도 급수가 있는 셈이다. 유장한 강의 연속적인 흐름을 일정한 규격의 단위의 콘크리트로 끊어내어 부자들을 위해 공여하는 것이 진실인데도, 온 국민을 위한 것인 양 온갖 학술적 담론을 동원하여 선전을 하니 어찌 극단적으로 뻔뻔스럽다 하지 않을 것인가.

뻔뻔스러움에는 상당 부분 착각과 허위의식에 의거한 확신이 곁들여 있다. 가시적인 표면의 수준에서는 쉽게 확신을 얻게 되는데,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탓에 확실하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확신에 찬 뻔뻔스러움이 넘쳐난다는 사실과 진실을 은폐하는 온갖 알리바이들이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넘쳐나게 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비가시적인 수준에서의 진실들이 그만큼 폭발하고자 하는 힘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가시적인 수준의 현상들이 비가시적인 수준의 실제를 거꾸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란 허위의식으로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무게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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