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고] 대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장소영
  • 승인 2010.05.1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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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09년 03월 27일

 


이영수 교수(독어독문학).


필자는 머리가 나빠서 늘 고민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일류고, 일류대학, 출세와 돈을 입이 닳도록 외치고 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경쟁한다. 여기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미국유학을 다녀오고 어떤 커리어를 거치고 영어를 말하고 컴퓨터를 잘 다루고 핸섬한 얼굴에 전문직을 간직한 멋쟁이, 여기에 너도 나도 덩달아 자녀를, 인간들을 부추기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개인의 욕심인가. 그 어떤 권력인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문화인가, 당신 자신의 본성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시대의 정신이란 말인가?

그 일차적 책임은 무분별한 매스컴에 있다. 더 파고들면 매스컴과 정치권력,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우리를 억압하는 주체들이다. 이곳에는 언제나 성공한 사람의 자기주장이 들어 있다. 인생은 경쟁이라고. 그래 그걸 누가 몰라. 인간은 모여 살면서 그렇게 경쟁하면서 산다고. 출세한 자가 외치는 성공논리에는 늘 경쟁이 들어있다. 바로 여기에 어줍지 못한 우리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끌려들어 꼼짝 못하는 끝없는 희생자들이 생겨난다. 모두가 살자고 아니 더 잘 살자고 이렇게 사활을 건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중용은 말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똑똑한 척하여 함정에 걸리는 줄 모른다."
우리의 인식은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 실현을 둘러싼 일상적 투쟁에 매몰되어 있다. 현실 충족 여건인 돈벌이와 성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바로 그 욕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위대한 사회라고 믿고 있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을 기획하고 있는가. 성형수술이 나라를 뒤덮고 결혼하기에 적절한 상대를 못 만나 처녀들이 독신으로 늙어가고 청년들이 시시한 일은 거절하고 있다. 문화가 내 모는 그 투쟁의 벌판은 살벌하기만 하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저 도도한 파도는 우리를 끝없이 내동댕이치고 있다. 저 아래 낮은 서민에서부터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어느 누구 한 사람 피해자 아닌 사람이 없다. 이 문명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문화의 지옥불 앞에 서 있는 한, 그 위대한 기획(정신적 안정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시지프스의 신화인가. 마침내 그 치닫는 욕망이 마침내 이루어져도 행복이 아니다. 모든 개인의 욕망이 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적 본성,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60억분의 일을 만드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 그 욕망은 언제나 자신의 ‘내적 본성’과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충족은 곧 사회적 해악과 갈등, 개인의 피로와 소모로 연결된다. 과연 내적 본성이 있기나 한 것인가. 우리는 인간의 내적 본성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적인 본성, 지나친 경쟁과 편리한 문명 속에서 우리는 내적 본성을 잃어버린 채 인간은 대체로 같은 욕망을 가졌다고 믿고 출발한다.

내적본성, 그것은 쉽게 설득이나 교화로 얻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자각과 더불어 자신의 체험적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도 자신을 갈고 닦는 각고의 노력이. 미쳐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기위해서라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현자들은 모두가 인정한다. 인간이란 자기만의 특정한 목적과 자기만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욕망이 권력과 산업, 매스컴에 의해 자아를 속이고, 가까이는 의례적인 남의 입방아 속에 우리가 타율적으로 살고 있다. 거대한 무지와 환상의 비현실 속에서 추상적이고 타율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미처 살다가 미처 죽는 것은 더욱 불행하다. 정말 당신의 당신 자신의 고유한 자기 본성에 따라 살고 있는가? 날아가는 돌멩이가 자신의 의지로 나른다고. 당신도 떠 밀려가면서 자신이 자신의 길을 간다고 믿고 있는가? 대안은 없는가.

여기서 필자는 돈벌이나 경쟁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약간의 조언을 더하고자 하여 쓰는 글이다.

현대 사회의 공부는 평생과제가 되고 있다. 학교에서 공부, 대학에서의 공부는 여전히 우리 에게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누구나 좋은 성적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고 그렇게 취업문을 열고 들어가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다. 많은 학점을 따고 리포트를 준비하고 시험을 치루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영어의 열풍이 몰아닥쳐 누구나 영어 잘하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당신도 서툰 공부해보았지 않았소. 과외 선생이나 학교 공부 성실히 하면 되는 영어가 국민적 관심사로 바뀌어도 왜 이렇게 나는 여전히 죽을 쓰고 있는가. 아직도 공부가 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 때문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를 머리로 한다고 생각해서 고전했다. 공부란 눈으로 하는 이성의 몫이 절대 아니다. 이성이란 수학적 계산 능력인데 이 능력으로 이루어질 내용이 거의 없다.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눈, 코. 입, 손발, 배, 그리고 머리로 공부를 한다. 공부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한답시고 몸을 관리하지 않을 경우 공부가 전혀 안 된다. 영어와 수학은 이성으로 하고 체육이나 미술은 손발로 하는 것이라고 믿는 한 당신의 공부는 백년하청이다. 태도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지는 법. 이성(Vernunft)도 몸의 일이고 성격(Character)도 몸이 하는 일이고 분노(Anger)도 기쁨(Pleasure)도 몸의 일이다. 몸을 전체(whole body)로 사용해야 공부가 된다. 축구나 피겨는 육체로 하는 것이라고 믿는 한 공부는 요원하다.

필자는 공부를 잘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달리기에 선수가 있듯이 공부에도 선수가 있다. 우사인 볼트는 잘 뛰는 사람이고 조용필은 노래 잘 하는 사람이다. 기본적인 관점은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나름대로의 공부잘하기다. 내가 가진 재주의 범위에서 달리기하듯 공부 잘 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다. 내가 가진 재주를 나름대로 온전히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일이다. 내 일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쏟아왔지만 여전히 공부가 안 되어 힘들어 하고 있다.

그래도 때 늦게 그 원리를 깨달아 우리 후학들에게 그 비법을 전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조용필의 노래, 박지성의 축구,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박세리의 골프, 이창호의 바둑이 공부다. 추성훈의 격투기도 그의 공부다. 자기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만 열거한 것 같은 데 문제는 그것이 자기 분야이고 자기의 천성이라면 그게 바로 자신의 본성이 가장 잘 발휘된 영역일 것이다  여기에 머리로만 하는 운동이 따로 있고 몸으로 하는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그 본성에 맞게 노력했다는 것이다.

소림사의 황비홍이 겪는 훈련도 몸의 단련이었고 영어의 달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선생도 몸으로 영어를 했지 무슨 눈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몸의 발현이다. 몸의 현상이니 후천선천 가릴 것 없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몸에서 잘 못 나간 것이요. 노래 가락이 적절하지 않다면 내 몸의 목소리 발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잘 써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다리만 갖고 축구를 하는가. 무슨 팔로만 골프를 한단 말인가.

문제는 이성으로 공부를 한답시고 책상 앞에 잠시 앉아있지도 못하는 놈은 영원히 꼴등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박태환의 수영을 보고 있으면 수영이 되는 일인가. 아이삭의 영어를 본다고 내 영어가 느는가. 몸에 익혀야 한다. 따라해야 한다. 연습해야 한다. 외국어는 적어도 20여 년 닦아야 영어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자동차 운전 10여 년은 되어야 그래도 차를 몬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의 섹스(human sex)도 그렇다. 몸의 훈련이 없으면 섹스도 아니다. 뭘 모르고 덤비면 행복한 순간도 있는 법. 당신은 왜 담배를 끊지 못하는가. 몸이 훈련이 안 돼 있어 그렇다. 야구는 방망이로 하는가. 술이나 노름은 눈으로 하는가. 모두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운영하는 일이 공부다. 담배가 마음의 사건이 아니다. 나의 몸이 담배를 요구하고 있다. 마음으로 지운다고 그 욕구가 없어지는가. 하루아침 마음먹고 술 안 마신다고 금주가 되는가. 몸이 술에 익숙해 있고 그 분위기에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의 관성에 따라 술을 마시고, 노름에 훈련된 몸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공부에는 언제나 시간이 소요된다. 몸에 익히는 작업에 어떻게 시간의 경과 없이 되겠는가. 마음 비웠다고 철든 놈 보았던가. 금연(禁煙)은 오로지 몸의 단련(니코친에서 벗어나는)으로 달성되는 과제이다. 단련이 몸에 익어야 하는 법이다. 몸의 관성체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 관성이 곧 욕망이란 이름이요 그것이 몸에 익은 결과이다. 수신(修身)이 없이는 제가(齊家)도 없다. 함부로 유가의 가르침을 폄하할 일이 아니다.

서양 교육의 핵심적 맹점이 바로 공부를 머리(이성)로 한다고 믿은 것이다. 서구의 인간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하여 그 이성에 반응하다보니 모두가 교육을 망각한 것이다.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 교육의 최대 맹점은 바로 말씀(이성)에 있다.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만 난무하고 몸의 훈련이 빠져버린 데서 우리의 문화적 타락을 찾을 수 있다. 인사나, 식사법이나 예절이나 모두가 몸의 훈련으로 이루어 가야 할 사안이다.

이런 관점은 체벌이 학교교육에서 정당화 될 수 있고 그것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허용되어야 할 몫이다. 교육은 몸의 공부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야 한다. 체벌이 몸과 마음에 적정한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정돼야 한다. 서구의 얄팍한 자유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헛소리하는 교육학자, 체벌은 안 된다고 무슨 신념처럼 믿고 덤비는 골빈 관리는 물러나라. 어설픈 교육학자가 그걸 주장하고 교육청 관리가 따르고 무지한 국회가 그 입법에 찬성한 결과 우리의 문화는 지속적 타락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 청소년 범죄, 마약, 자유가 방종을 불러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냐. 노력 없이는 그 많이 듣던 한 곡조도 따라할 수 없지 않던가. 노래 한곡 못하는 인간이 무슨 공부를 논하겠으며 컴퓨터는 머리로 한다고 겁먹고 있는 당신은 평생 한 번도 자판기를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공부란 몸으로 하는 일이고 몸에 무엇을 익히려면 여기에는 반드시 시간이 들어간다.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이전 시킬 때에는 그 내용을 반드시 암호화해야 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알맹이를 자기 몸에 새기는 일이 필자가 소위 말하는 공부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출세하고 튀는 것도 가지가지, 공부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맞아야 한다.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건강이 없이는 승진도 경쟁도 출세도 없다. 공부란 건강한 몸의 건강한 문화적 발언이다. 고등학교에서 여러분이 공부를 아마추어처럼 했다면 이제 대학의 공부는 전문적(Professional)이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온 몸으로 달려들어 해야 할 것이다. 제군들의 건강한 공부법을 기대해 본다.


최초입력일/ 2009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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