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1950년의 미국과 2013년의 대한민국
[학술] 1950년의 미국과 2013년의 대한민국
  • 김무엽 특임기자
  • 승인 2013.09.02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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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뜨거운 화두, 매카시즘

 지난달 28일, 국정원이 '내란음모'라는 죄명으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여러 당직자들을 압수수색했다. 1980년 신군부가 유력 정치인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국정원의 주도로 벌어진 압수수색은 많은 의문을 남겼다. 국정원은 불법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를 받은 직후였고, 전국에서는 국정원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수시로 열리고 있었다. 사건을 터트린 시기라든지, 북한을 이용한 수법 등은 논란을 낳고 있다.

그런데 국정원의 노림수가 통했는지 이후 국민들의 여론이 나뉘기 시작했다. 통합진보당에는 이미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는데, 그 영향인지 국정원이 내란음모죄로 통합진보당을 들쑤시자 "종북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국정원의 행동을 옹호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다른 쪽에서는 "불법 대선개입 사건으로 코너에 몰려있는 국정원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북몰이, 즉 매카시즘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런 국면 속에 불법 대선개입 사건은 사라지고, 국민들의 뇌리에는 종북만이 남게 됐다.

국정원은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면을 전환한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국민들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건보다 더 자극적인 '내란음모죄'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 국민들에게 소위 '먹히는' 전략인 매카시즘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매카시즘, 불리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수단

▲ 당시 미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

매카시즘이란 단어는 1946년 미국 위스콘신주 연방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당시 매카시는 각종 불법과 추태로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1950년,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국민들의 관심은 그곳에 집중됐다.

여론이 동요하자 상원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매카시가 폭로를 계속할 때마다 그 숫자도 늘어났다. 신문들은 매카시의 폭로를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헤드라인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매카시는 반공주의를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국면을 뒤집어버렸다. 각종 불법과 추태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지고,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50년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2013년 대한민국을 또다시 시끄럽게 하고 있는 사건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매카시의 폭로 이후 민주당은 거기에 맞서지 않았다. 되려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카시에게 동조했다. 이는 매카시즘이라고 불리는 광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먼저 의심받은 사람들은 공무원, 연예사업자, 교육자, 노동조합 활동가였다. 공무원과 연예사업자는 차치하더라도, 교육자와 노동조합 활동가가 의심받는 것은 한국에서도 참 익숙하다. 매카시즘에 동조하는 이들이 거침없이 전교조나 민주노총 등을 종북 세력으로 지칭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은가.

미국 사회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 광풍은 무고하거나 불분명한 혐의와 불충분한 증거를 가지고도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매카시가 이끄는 비미활동위원회는 계속해서 공산주의자를 생산해냈다. 매카시가 지목한 단체나 인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고, 이런 상황은 매카시를 4년간 미국 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로 만들었다.

약발이 떨어진 매카시즘, 매카시의 몰락

온 미국을 들쑤시면서 많은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매카시의 약발도 끝은 있었다. 공화, 민주 양당은 오랜 매카시즘의 광풍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1952년, 공화당이 오랜 민주당 정권을 뒤집고 집권에 성공하고 선거에도 승리해 다수당이 되면서 매카시즘은 순간 그 매력을 잃게 됐다. 더불어 공화당은 매카시가 점점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다. 고삐 풀린 말이 오히려 자신들을 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 극단적 매카시즘을 보여주는 만화표지.

이에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양심선언을 통해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 된다"고 개탄했으며, 미국 연방대법원도 미국헌법의 제정정신에 따라 국가안보 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처벌자 대부분의 평결이 번복됐다. 그리고 위헌적으로 공포된 법과 면직 조치도 나중에 불법으로 결정되거나 소송을 청구할 수 있게 되고 혹은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인정받았다. 매카시에 의해서 기소된 인사들 중 아무도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매카시즘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한국적 매카시즘, 북풍과 국가보안법

미국 정계에서 매카시가 반공주의를 통해 유력인사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면, 한국에서는 매카시즘을 가지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있다. 바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불완전한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광신적인 반공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제주도에서 민간인 3만여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제주4.3사건)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좌파 전향자로 구성된 반공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희생된 민간인이 적게 잡아 2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자신이 남조선노동당의 군사총책이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친다. 이는 박정희가 발표한 혁명공약 제1항을 보면 알 수 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또한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들의 근거가 바로 '내란음모죄'였다.

박정희 정권의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도 이전 정부의 유산을 제대로 사용했다. 국가보안법과 북한의 존재는 군사정부의 독재 체제를 다지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었고,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쉽게 제거됐다. 이런 방법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권력자들이 북한에게 총을 쏴달라고 부탁하거나 전 대통령이 NLL을 북한에 넘기려 했다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보여도 다수의 국민들은 북한이 두려워 그것을 믿기에 급급했다. 국민들이 60여 년 동안 북한의 침략이 두려워 쉽게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정권에 내어주고 만 것이다.

북한은 대한민국에서 끊임없이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돼 왔다.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민국 정치지형이 요동쳤고, 중요한 사건들이 북한이라는 카드에 잊히거나 은폐됐다. 국가보안법 역시 마찬가지다. '빨갱이'에서부터 '종북좌빨'까지 매카시즘은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국민들은 이런 모습을 수없이 보면서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지 또다시 휩쓸리고 있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언론들은 1950년대의 미국처럼 기사를 쏟아내고, 정작 중요한 일들은 잊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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