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
[학술]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
  • 김무엽 특임기자
  • 승인 2013.10.0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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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자들은 왜 충돌하는가

 최근 한 출판사의 역사교과서 논란 때문에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역사 왜곡이 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했다'는 이유였다. 이런 논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역사관 차이에서 논란 발생해

역사에 관한 논란은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는 역사가 가진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역사는 보통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기술이라는 두 측면의 의미로 정의된다. 객관적 사실은 독일의 역사가인 레오폴드 폰 랑케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한 것에서, 주관적 기술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헬릿 카가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한 것에서 연원했다 할 수 있다.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은 '주관적 기술'의 영역에서다. 역사는 연구하는 사람이 직접 그 시대를 목격하고 경험한 것이 아니므로 연구자의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해석의 차이를 다르게 말하면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관이란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견해로, 역사에 대한 역사가의 이해, 해석원리, 가치관, 관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회상과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그만큼 다양한 역사관이 존재한다. 여러 역사관 중 대표적인 것들을 뽑자면 실증사관, 유물사관, 식민사관, 민족사관 등을 들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김수연 기자

먼저 실증사관은 앞서 언급한 레오폴드 폰 랑케의 말과 같은 것으로 과거의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만을 역사로 인식하는 사관이다. 다음으로 유물사관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역사해석 체계로, 사적 유물론이라고도 한다. 유물사관은 역사해석에서 여러 인과적 요인 중 물질적 생산력을 가장 중요시한다. 즉,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양식이란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단계는 각 시대마다 노동도구의 발달단계로 표현되기 때문에 유물사관에서는 생산기술 발달에 중점을 둔다. 유물사관은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원시공산제-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단계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본다. 그리고 노예제에서 자본제 사회까지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인정되고, 이에 따른 계급대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관이다. 식민사관을 한국사에 대입해보면, 크게 일선동조론,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으로 나뉜다. 일선동조론이란, 한민족은 일본인에게서 갈라진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일제는 한일합방을 한국을 위한 배려와 도움인 것으로 포장했다. 일선동조론은 1930년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 사상의 근거가 됐고, 일제의 식민지 침탈과 동화정책, 황국신민화, 민족말살정책의 정당화에 이용됐다.

타율성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 스스로의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한국사가 주변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고 가정한 채, 한국사의 자율적 요소나 대외투쟁에서의 승리를 과소평가하거나 감추고, 타율적 요소만을 강조하여 이를 한국사의 주류로 보는 논리다. '단군'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부정하고 신화로만 인식하거나, 일본의 신공황후가 한국의 남쪽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후 수세기 동안 그 일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 그 예다.

정체성(停滯性)론은 한국이 근대로 이행하는데 필요한 봉건사회로의 발전에 이르지 못해 근대 초기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일제가 유물사관을 빌려와 식민사관의 논리로 이용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유물사관의 이른바 '보편적 역사발전단계'를 기반으로 일제는 당시 한국 사회의 경제체제가 고대노예제 사회와 비견된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봉건제 결여론을 펼쳤다. 이러한 정체성론은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됐다.

당파성론은 한민족의 민족성이 분열성이 강해 항상 내분을 일으키며 싸웠다는 주장이다. 한민족의 혈연, 학연, 지연과 배타성이 역사현실에 반영돼 당쟁주의가 나타났다고 보고, 이를 서로의 이해를 두고 싸우는 정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정책대결이 아닌 정권 쟁탈전에 집착해 정치적 혼란, 사회적 폐단을 유발하였기에 조선왕조가 멸망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민족사관은 식민사관에 대항해 나온 것이다. 한국사의 입장에서 본 민족사관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에 저항해 한민족의 기원을 밝혀내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강조한 역사관이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 친일학자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이 확산되자, 민족사학자들은 민족사를 바로잡고 주체적인 역사인식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한국역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민족 영웅의 업적을 찬양하여 식민사관에 대항하기도 했으며, 식민사학이 강조한 한사군 문제와 임나일본부 문제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했고, 식민사학이 의도적으로 신화로 처리한 단군문제도 역사적인 사실로 강조했다.

식민사관 대 민족사관, 해석의 충돌

앞서 나열했던 역사관들은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론으로서는 별다른 문제없이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은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이 가장 크게 대립하는 부분은 사회경제적인 부분에서다. 바로 내재적 발전론(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립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후기 사회가 내적으로 다양한 발전전망을 가진 사회였음을 논증한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조선후기에 성장했던 자본주의의 맹아가 강제적인 개항과 일제의 침략으로 왜곡됐고, 이에 한국 사회의 발전이 억압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한국 경제의 성장은 식민지하에서의 경제성장과는 무관하며, 해방 이후 일제에 억압됐던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가능성도 해방된 것으로 본다.
이런 내재적 발전론의 반론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했다. 한국이 60~70년대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식민통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한국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전국의 토지를 근대적인 소유관계로 개편할 수 있었으며,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미곡 생산량이 급증하였고, 중공업화 등으로 인해 사회간접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식민지 지배하에서 겪었던 자본주의의 경험과 갖가지 근대적인 사회제도들로 인해 한국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갈등을 넘어 학문의 발전으로 나아가야

이처럼 전 세계의 역사 중에서 일부에 불과한 한국사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에 관한 대부분의 논쟁은 역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역사적 해석의 차이는 학문의 자유로 존중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같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받아야 하고 분명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정'이 있고 정에 반대되는 '반'이 있으며, 이 정과 반의 갈등을 통해 합이 도출돼 진보한다고 한다. 학문에 있어서도 이를 적용시킬 수 있다. 정이 있다면 반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의 갈등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학문을 이룰 수 있다. 다양한 해석들을 존중하고 그것들의 갈등을 통해야만 학문은 진일보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안건훈, 『역사와 역사관』, 서광사, 2007
- 김기주, 『역사관과 역사산책』, 애니빅, 2012
- 조지형, 『랑케 & 카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김영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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