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고려말 두 영웅의 선택
[맞수] 고려말 두 영웅의 선택
  • 김민지 기자
  • 승인 2014.03.04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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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과 이성계

 

 

 

 

▲ 최영과 이성계는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결정적인 선택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맞수란 힘·재주·기량 등이 서로 비슷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를 뜻하는 말이다. 이번 호부터 새로 선보이는 코너 '맞수'에서는 역사 속 인물 중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조명, 비교·분석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다. 처음 선보이는 인물은 고려 장군이었던 최영과 이성계다.

두 사람은 20살가량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고려 공민왕 재위 당시 전쟁터를 함께 누빈 사이였다. 무인으로서 최영의 첫 시작은 양광도 도순문사 아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의 섬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고려 해안을 계속해서 침범해왔다. 이후 최영은 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물리치고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외부의 침입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를 잘 지켜냈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왜구와의 전투에서도 이성계의 무공은 빛이 났다. 우왕 6년, 왜구와의 전투 도중 왜에서 온 다른 군사의 등장에 고려군은 대비하지 못하고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부하를 이끌고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섰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성계가 크게 승리했다. 이후 이 전투는 '황산대첩'으로 불리게 된다.

최영과 이성계는 왕권이 쇠락한 상황에서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잘 지켜내며 공민왕과 우왕의 재위 시절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된다. 함께 승승장구하며 고려를 지키던 두 사람은 요동정벌로 인해 인생의 갈림길을 맞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은 원(元)이 명(明)으로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명은 고려에게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요구를 했다. 철령 이북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했던 곳으로, 명나라는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에 말도 안 된다며 반발했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고 △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를 차출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좋지 못하며 △많은 군사가 나라를 비우면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고 △장마철이라 활에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모두 병에 걸릴 것이라는 이유를 들며 진군을 반대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요동 정벌을 강행한다. 하지만 장마철인 탓에 압록강 하류가 급격히 불어나 진군하지 못하게 된다.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에게 회군을 권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한다. 결국 이성계는 함께 움직이던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리기 시작한다. '위화도 회군'으로 순식간에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우왕을 귀양 보내고 최영은 처형시킨다. 실록에 따르면 처형 당시 이성계는 "이 같은 일은 나의 본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라고 말하며 최영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이성계는 고려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자리 잡으며 창왕을 고려의 왕으로 추대한다.

위화도 회군 이전까지 최영과 이성계는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영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철원 최씨 가문이다. 선조 대부터 그의 가문은 왕과 고려에 충성해왔다. 최영 또한 고려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며 왕을 지켰다. 기득권 세력인 그는 개혁을 추구하는 신진 세력이 탐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건국의 주축이었던 신진사대부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았다.

반면 이성계는 지방 출신으로 별다른 기반 없이 홀로 성장해 중앙으로 진출한 장군이다. 최영보다 젊은 나이여서 신진사대부들과의 접촉도 잦았다. 오로지 왕의 의견만을 중시하는 최영과 달리 이성계는 나라에 어느 정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둘은 차이를 드러낸다. 최영은 주로 왕의 친위대를 중심으로 군사를 꾸린 반면 이성계는 그의 선대에서부터 쌓아온 군사력과 지방민들이 주요 기반이었다. 이 때문에 왕을 공격하는 결정도 큰 무리 없이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각자가 선택한 삶은 평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최영과 이성계는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결정적인 선택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고려 입장에서 이성계는 충성을 맹세한 왕을 저버린 배신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패한 고려에 개혁을 일으키며 역사 속 승리자로 남은 사람은 이성계다.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 만약 최영과 이성계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참고도서 <김갑동, 『라이벌 한국사』, 애플북스, 2007>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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