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내 별명은 '사기캐'
[맞수] 내 별명은 '사기캐'
  • 박유안 인턴기자
  • 승인 2014.09.01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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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다산 정약용(왼쪽)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오른쪽). <일러스트레이션=이승은 인턴기자>

 래퍼 빈지노의 'Profile'이란 곡에는 "내 aka는 사기캐"라는 가사가 나온다. '사기캐'(사기 캐릭터)란 다양한 분야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 가지 능력만으로도 업적을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 소개할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천재적 능력도 갖춘 데다 많은 업적까지 남긴 '사기캐'들이다.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다산 정약용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성장배경은 많이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부유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 당시 서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 중 하나였던 의사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공증인으로 사는 삶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길은 화가의 삶이었다. 14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 본 아버지가 당시 피렌체에서 이름난 화가인 베로키오의 공방에 수습생으로 보냈다. 도제 생활을 하며 유명 화가들의 작품도 많이 접했던 레오나르도는 그들을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하며 성장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조선시대 기호남인 핵심 가문의 적자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네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에는 시를 짓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15살이 되던 해 그는 한양으로 갔다. 당시 한양은 정조가 즉위하며 활력이 넘치던 당대 최고의 지적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한양에서 그는 성호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이승훈, 이벽, 이가환을 만나 새로운 학문 세계를 접하고 실학의 초석이 된 자신의 공부 방향을 정했다. 이렇듯 시작은 달랐지만 둘은 어린 시절부터 각각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레오나르도와 정약용의 천재적인 재능은 본래 집중하던 영역을 넘어 다른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펼쳐졌다. 레오나르도는 20대에 예술에 집중하다 30대엔 밀라노로 갔다. 그는 스포르차 가문에 화가로 초빙돼 조각, 건축, 수학, 과학, 음악, 철학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했다. 30여 구의 시체를 해부한 끝에 인체 해부도를 남겼고, 병장기, 무대장치, 비행기 등 다양한 장치를 고안하기도 했다. 흑사병이 도진 밀라노를 위해 위생 도시 및 도로설계를 구상하는 건축가로도 활동했다. 예술에서도 사실주의에 입각해 르네상스 기법을 집대성했다. 레오나르도만의 독특한 원근법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최후의 만찬>도 이 때 완성됐다.

정약용 역시 많은 업적을 남기며 청춘을 보냈다.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 후, 6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정약용은 유학, 건축, 정치, 저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그에게 신뢰가 두터웠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배다리의 설계를 맡겼다. 또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인 '거중기'를 발명해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하는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암행어사로도 활약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지방 행정의 현장과 민생의 실상을 체험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현실 인식의 방향을 잡게 됐고, 그 해결 방법을 구체화하는 실학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말년 역시 다른 듯 닮았다. 그들의 마지막은 찾아온 고난을 이겨내고 본래의 뿌리로 돌아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쉰 살 즈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피렌체에서 공방을 운영하면서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을 표현한 <모나리자>도 그려내 고전적 예술의 위대한 경지를 보여줬다. 그러던 중 67세에 임종을 맞게 되는데 그가 태어났던 피렌체도, 젊음을 쏟아 부은 밀라노도 아닌 프랑스에서였다. 이탈리아가 프랑스에게 정복당한 역사 때문에 떠돌던 말년이었지만, 마지막 길은 프랑스의 성에서 편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정복당한 나라의 사람이지만 세계적 예술의 거장으로 그를 인정하며 경의를 표한 것이다.

정약용의 탄탄대로 관직 생활도 그와 형제들이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 문제가 돼 결국엔 유배로 마무리됐다. 정약용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할수록 천주교 관련 과거 행적은 정적들에겐 공격의 빌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유배지에서 500권이 넘는 저술활동을 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개혁과 민생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57세가 돼서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그동안의 저술을 마무리하며 실학을 체계화 하는데 힘썼다. 형법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흠흠신서>를 남겼다. <흠흠신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를 계몽하는 최초의 수사학서로 평가된다. 또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목민심서>는 그가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해가던 때에 완성한 저술로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위대한 천재를 단련하기 위해 신은 모진 담금질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보통 사람은 그 모진 현실에 결국 포기하기 마련이지만 두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해 더 많은 일을 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역사적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정약용이 조금 더 개방적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의 천재성은 아마 더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참고도서
<『창조의 수수께끼를 푼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성두, 아이세움, 2002> ,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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