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야 아프지 마 #1
바나나야 아프지 마 #1
  • 서영우 기자
  • 승인 2014.09.01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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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자원과 종의 다양성
▲ 반세기 넘게 이어져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인간-바나나-병균의 삼각관계는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일 품종만을 집중적으로 대량 재배해 벌어진 필연적 사건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바나나가 아프다. 현재로선 치료할 방법이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바나나 농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뉴스채널 CNBC는 바나나 산업이 심각한 위기라고 크게 보도했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바나나를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 지구 상에서 바나나가 없어진다는 건 우리에겐 그저 맛있는 과일 하나를 먹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르지만 열대 지방에 사는 이들에겐 생존의 위협이다. 그들에겐 바나나가 우리의 쌀이나 무, 배추 같은 중요한 먹거리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4억 명가량의 사람이 바나나를 중요한 식량자원으로 쓰고 있다.

우리에겐 값싼 간식거리,
그들에겐 쌀과 같은 존재

기자는 친구들과 바나나를 갖고 논쟁을 한 적이 있다. 바나나에는 왜 씨가 없을까? 오랜 입 싸움 끝에 바나나를 그대로 땅에 꽂아놓으면 나무가 될 것이라는 가설(?)이 우리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야생 바나나는 석류처럼 속에 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먹는 바나나는 영국의 한 정원사가 우연히 발견한 품종을 상업 재배한 것이다. 바나나의 품종은 수백 가지에 이르지만 대량 재배, 수출, 식용으로 편리한 품종만 집중적으로 생산하다 보니 현재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바나나는 '캐번디시' 단 한 품종뿐이다.

▲ 야생의 바나나는 속이 씨로 가득 차있다. <출처-위키미디어>

지구 상에서 상업용 바나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캐번디시 품종 이전 1960년대 '그로미셸'이라는 품종이 당도가 높고 과실이 커서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다. 하지만 토양성 곰팡이병인 바나나마름병(일명 '파나마병')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파나마 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이 병은 식물의 뿌리를 통해 침투한 균이 바나나의 관다발을 막아 수분 공급을 차단시켜 말려 죽인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 그로미셸 품종은 세계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파나마병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품종을 발견해낸 것이 '캐번디시'다. 바나나마름병에 내성도 있고 상품성도 갖추고 있어 그로미셸을 대체할 완벽한 바나나였다. 하지만 이 품종도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변종 파나마병(TR4) 때문에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파나마병에 내성이 있기 때문에 세계 시장을 장악한 캐번디시였지만 변종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인간-바나나-병균의 삼각관계는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일 품종만을 집중적으로 대량 재배해 벌어진 필연적 사건이다. 자연계에는 수만 가지에 이르는 생물이 존재하고 그 생물 안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종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생물 중에서 현재 인간이 식량으로 직접 이용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단 12종의 고등식물(밀이나 옥수수 같은 꽃식물)이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식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이다. 식용 가능한 고등식물이 1만 2,500종이 넘는 걸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이 허락한 선물의 0.1%도 누리지 못하는 셈이다.

'치킨느님' 영접하지 못 할지도…

소수 품종을 상업적으로 대량 재배하게 되면 장점도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한다. 재배종은 대개 유전적 다양성이 낮아 환경 변화가 야기하는 위험에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재배종과 유사한 종이나 야생종의 생물 다양성은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천연기념물, 멸종 위기종 등의 이름을 붙이며 동·식물을 보호하는 게 단순히 생물 존엄 같은 윤리적 문제도 있지만 식량 자원으로서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곡물 종의 다양성이 75%나 감소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사태를 좌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150년 전, 아일랜드에서도 지금의 바나나 사태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극심한 빈부격차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들이 텃밭에 감자를 재배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1842년 미국에서 발생한 감자마름병이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이다. 감자밖에 먹을 수 없었던 극심한 빈곤과 1846년의 기록적인 한파, 그리고 단일종만 재배함으로써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수확 구조가 아일랜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른바 '아일랜드 대기근' 사건이다. 이로 인해 850만 명 이상이었던 아일랜드 인구의 1/4이 굶어죽고 1/4이 이민을 가서 인구가 반토막 난 이후 현재까지 회복을 못하고 있다. 그리고 감자밖에 먹을 수 없게끔 만들었던 영국인 대지주들의 횡포로 인해 생겼던 악감정이 아직까지 아일랜드와 영국의 불화로 이어지고 있다.

두 세기나 전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아일랜드 대기근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사정은 달라도 소수 작물종만 재배·소비하는 구조, 그 속에서도 단일 품종만을 고집하는 모습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의 행보와 닮아있다. 그 결과로 세계인의 식탁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이제는 쌀 문화권, 밀 문화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나라의 밀 소비량이 늘었다. 국제열대농업센터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제는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비롯한 섬과 오지 등에서도 전통적인 고유 식재료보다 밀이나 감자, 육류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대신에 고구마, 얌, 호밀같이 지역적으로 중요한 식량 자원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세계 식량과 사료 생산의 60% 이상을 곡류가 담당하고 있으며, 이 곡류 총 생산량의 반 이상이 밀, 벼, 옥수수, 보리 4종이다. 그런 가운데 상업용 옥수수는 6개 품종이 세계 생산량의 71%를, 벼는 4개 품종이 65%, 밀은 9개 품종이 50%를 차지한다. 좀 더 극단적인 경우 완두콩은 2개 품종(96%)이, 감자는 4개 품종(70%)이 세계시장에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이 소수 품종에 의존하기 때문에 많은 품종이 멸종해 버린다.
품종의 감소는 유전적 취약성의 문제도 유발한다. 병균, 해충 등의 침입이나 이상기후에 의한 소실, 그리고 저장 유전자원의 제한으로 병에 걸리기 쉬운 성질이 되는 것이다. 그 근본 문제는 작물이 넓은 지역에서 유전적으로 획일화됐을 때 병충해의 대발생에 좋은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육류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닭은 난용종(달걀 생산)과 육용종(고기 생산), 소는 유용종(우유 생산)과 육용종으로 구분돼 각 용도에 적합한 품종을 사육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빨리 자라고, 많은 효율을 내는 품종이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고기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이 시점에서 무엇 하나라도 멸종하게 된다면 그 파장은 감당하기 힘들다. 소수 품종만 사육한 탓에 질병에 취약해진 가축이 집단 폐사하는 사건, 이를테면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때문에 뉴스가 시끄러워지는 모습을 자주 봤을 것이다. 지금은 고깃값이 오르는 정도로 끝나지만 언젠가 고기를 영영 못 먹게 될 날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주는 자연의 경고

▲ 스피츠베르겐 섬에 위치한 종자보관소. 빙하가 녹아도 침수되지 않도록 해발고도 13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출처-EBS지식채널e>

생물 다양성은 단순히 식량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지구 환경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발도상국들의 급속한 성장 때문에 생물 다양성에 대한 위협이 심화되자 세계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생물 다양성 협약(CBD)'을 통해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는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지구환경기금(GEF)'을 통해 전 세계 155개국 750개의 생물 다양성 프로젝트를 위해 기금을 유치하고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북극점에서 1,300km 떨어진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거대한 종자 저장고가 있다. 만약 이번 일로 인해 바나나가 지구 상에서 멸종하거나, 세계대전 같은 전 지구적 규모의 대재앙이 발생했을 경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식물의 씨앗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진 일종의 '씨앗 은행'이다.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때 동식물을 지켜낸 것에 비유해 '최후의 날 저장고(Doomsday Vault)'라고도 불린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는 전 세계 540만 종이 넘는 씨앗들이 품종당 500여 개씩 보관돼 있다. 핵 전쟁, 지진, 지구 온난화 등 상정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재난에 대비해 지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안전하다.

세계인의 식량 문제와 결부되는 생물 다양성에 관한 논의는 이처럼 리우 협약이나 종자 보관소 같은 전 지구적 규모의 협의를 통해 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 식량 자원의 획일화와 그 독점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개발과 발전, 편의를 앞세워 나오는 인류의 이기심 앞에 이런 논의들은 항상 뒷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바나나 사태는 인류에게 주는 자연 혹은 신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바나나로 끝나지만 다음엔 그 대상이 밀이 될 수도, 닭이 될 수도 있다. 닭이 없는 세상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 참고자료 <『2013 축산물 유통실태』 김성호, 축산물품질평가원, 2013> <『가축사양학2』 정천용·이효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12> <『인간과 식량』 성락춘·이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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