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조선
메리 크리스마스, 조선
  • 안희석 기자
  • 승인 2014.12.0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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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이척. 순종이죠.

내 이름은 이척이다. 내 나이 열하고도 셋을 더한 때가 되던 해, 서양 교육자 양반이 조촐한 식을 거행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라는 양반은 우리와 몹시 다른 외양이라. 품성 곧음이 느껴졌고 언성마저 굵직하니 내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지만 이름자가 조선인에 비해 몇 곱절은 길었기에 외우는 데 반나절이나 걸렸다. 이 양반이 거행한 식 이름은 성탄절이니 금시초문인 구미(歐美)의 명절이었다. 풍문으로는 언더-우드 양반이 본인의 집에서 조선 개신교인들과 식을 치렀다 하니, 궁금해도 왕실 밖을 마음대로 노닐 수 없는 내 처지가 딱하였다.

일곱 해가 지나고 키가 상당한 서양 선교사 처자가 우리 궁궐을 찾았다. 나 역시 그 자리에 함께 했는데, 듣자 하니 어마마마께서는 이미 그 처자와 자주 접선하던 모양새라. 어마마마는 나를 곁에 앉혀두고 성탄절의 의미와 거행 방도를 묻기 시작했다. 처자가 어마마마께 아뢰는 서양의 사상은 우리의 것과 판이하였다. 천사며, 별과 자유, 심지어 예수라는 존재를 처음 듣는 나와 어마마마는 미국(美國), 말 그대로 그 아름다운 나라에 대해 꿈꿨으니.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찾아온 서양 조상이 더욱 궁금해지던 밤이었다.

몇 날이 흘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심히 추운 겨울, 그 성탄절이라는 행사를 우리 왕실 안 구석에서 동그마니 치렀다. 그날은 조선 명칭 성탄절 대신 서양 명칭 크리스-마스라 칭했다. 서쪽 양반들은 크리스-마스 때 집안에 나무를 세워놓는 풍습이 있다 하여 우리 궁 안에도 나무를 들였다. 나와 어마마마는 릴리-아스 선교사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궁녀들을 관망했으니. 그 광경이 참으로 기이하여 어마마마께서 궁실에 들어가신 뒤에도 한참을 감상했다. 궁 안에 나무를 들여 열심히 치장하는 모습을 내 어디서 볼 수 있었으랴. 완성된 치장 나무의 장식 초에 불을 붙이자 썩 영롱하였다. 허나 궁 내 모든 불빛을 꺼트린 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던 릴리-아스 처자의 청은 거절하였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개탄할 왜놈들의 서슬 퍼런 칼날로 인해 꽃 같은 어마마마가 눈을 감았다. 치장 나무를 보며 기뻐하던 어마마마의 모습을 되새기니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황제폐하를 따라 시국 정비에 힘썼다. 내 연경 스물하고도 하나. 더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듬해 성탄절 전날 미시(未時), 독닙신문에서 처음으로 성탄절 기사를 봤다.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라고 운을 뗀 신문은 익일 휴간을 공보하고 있었다. 서양의 온 나라가 예수 탄일엔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축하하니 그들 역시도 휴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신문명을 핑계로 쉬겠다는 그들이 내심 얄미워 상소하려다 그 아이 같은 억지에 절로 웃음이 나 그만두었다.

우리 대한제국에 처음으로 백성들도 참여하는 성탄절 행사가 열린 날이 있었으니. 그 날만큼은 나도 왕실 밖으로 나가 광경을 지켜봤다. 음력 초파일에만 달리던 연등이 지천 공중에 줄지어 빛나고 있었다. 듣자하니 서양에서는 연등보다 좀 더 작게 빛나는 것들을 매달아 놓는데, 그 형세가 우리 연등과 비슷하여 이렇게 달았다고 했다. 회당에서 열리는 연회에 온 백성들이 구경하러 들어가는데 회당 문턱이 다 상할 기세였다. 동지로 매년 해를 마무리하던 백성들에게 서방의 새로운 명절은 다들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했다. 회당에서는 성탄극도 열린다 하였는데, 아무리 변복(變服) 하였어도 백성과 극을 같이 보는 건 체통에 심히 어긋난다 하여 그만두었다.

그 날은 아주 어린 아이나 처자들에게 선물도 나눠줬다. 아이들에게는 석판과 석필을, 처자들에게는 조그마한 봉지를 나눠줬으니. 봉지 안에는 땅콩, 일본 사탕, 과자 두 개, 오렌지라 하는 커다란 귤 모양의 과일이 들어있었다. 서방국의 종교와 우리 조선의 풍습이 만난 성탄절 행사 덕분에 그 날은 칼바람에도 내심 마음이 따뜻했던 걸로 기억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1800년대 후반, 한반도의 크리스마스

앞의 이야기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이 어린 시절부터 바라본 조선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묘사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그가 당시 처음 들어온 크리스마스라는 기념일을 어떻게 바라봤을지 상상해봤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마마마, 즉 명성황후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몹시 궁금해했고 서양 종교를 존중했다고 한다.

황후와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는 릴리아스 호턴 언더우드가 저술한 『상투의 나라』 에 자세히 나와있다. 당시의 조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책으로 쓴 릴리아스는 황후에게 직접 크리스마스를 설명해준 장본인이다. 책에 따르면 황후는 선교사들과의 접견을 통해 성탄절이라는 서양 명절을 듣게 됐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선교사들과의 교류 이후, 조선의 궁 안에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됐다. 서양 선교사와 조선의 선교사, 그리고 궁녀들이 함께 나무를 장식했다. 하지만 그때는 일본의 침범이 빈번하던 시기라서 궁내의 조명을 낮추자는 제안은 거절했다고 한다. 아마 시국이 시국인만큼 모든 조명을 없애기엔 불안했던 모양이다.

극소수의 조선 사람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접한 때는 1887년이다.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세례받은 조선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성탄절의 의미를 설명하고 음식을 베풀며 같이 즐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의 기독교 신자가 몇 없던 걸 생각해보면 초대받은 그들이 한국 크리스마스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수의 일반 백성이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가한 일은 1897년 『대한크리스도인회보』 기사에 기록돼있다. '배재학당'으로 불리는 회당에서 행사가 진행됐는데,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가 그들의 종교관을 펼치기 가장 적합한 날이라 여겨 행사를 거행했다고 한다. 음력으로 명절과 기념일을 지정하고 한 해의 마무리를 동짓날로 보내던 백성들에게 서양의 양력 명절은 실로 기이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 양력의 개념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니 일반 국민들은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을 것이다.

거북선 대신 남대문크리스마스 씰탄생

조선에 크리스마스를 가지고 온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내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이고, 명성황후와 자주 이야기하며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그들은 모두 서양의 선교사다.

순종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는 부부 관계다. 그들은 조선과 조선인을 몹시 사랑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특히나 따뜻한 감성으로 선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에 관한 논문까지 발표될 정도니 그 마음을 알만하다. 호러스의 부인 릴리아스는 조선의 상세한 모습을 기록한 『상투의 나라』 의 저자다. 이 두 사람은 우리 궁궐에 특히 자주 방문했던 선교사들이다.

이들 말고도 한국의 초기 크리스마스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선교사가 있다. 바로 '셔우드 홀' 박사다. 그는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다. 그 역시 한국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꼭 한국 땅에 시신을 묻어달라던 셔우드 홀 박사는 1991년, 양화진 외인묘지에 잠들었다.

▲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

그가 만든 우리나라 첫 크리스마스 씰은 1932년에 발행됐다고 기록돼 있는데, 사실 진짜 첫 크리스마스 씰 도안은 이에 앞서 기획됐다. 당시 셔우드 홀 박사는 씰 디자인에 거북선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거북선의 포를 결핵 마크에 조준하며 결핵을 무찌른다는 의도의 그림을 씰 도안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치하의 식민지였던 시대라 도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의 성벽 '남대문'이 한국 크리스마스 씰의 첫 도안으로 1932년 발표됐다.

크리스마스는 뜬금없이 들어온 서양 명절이 아니다. 조선을 사랑한 서양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존중한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문화다. 하지만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처음의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크리스마스가 다소 상업적인 행사로 변한 건 1930년대부터다. 모던 열풍이 불면서 크리스마스 문화가 급속하게 변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월급쟁이들 헛바람 내는 크리스마스이브'라고까지 표현했다. 다같이 즐기는 따뜻한 문화였던 성탄절이 몇 년 사이에 상업적 기념일로 변모한 것이다.

'모던하게' 지갑을 여는 날

상업적 기념일로 변모한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한 해의 마지막 공휴일이라는 점에 있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직장인 비율이 크게 늘었는데, 그들이 받는 연말 보너스 역시 크리스마스를 '돈 쓰는 날'로 만든 원인 중 하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휴일에 여윳돈까지 생기는 상황이니 상인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1936년 매일신보에는 '간악한 상인들이 보너스 덕분에 조금 무거워진 샐러리맨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책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상황이 아니다. 아시아권이나 서방권에서도 크리스마스에 매출량이 급증한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자체가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라 다른 나라 역시 그날만큼은 돈을 많이 지출하는 셈이다. 하지만 무조건 놀고먹자는 문화는 아니다. 국민 대부분이 기독교인 호주는 크리스마스 하루 동안 대형마트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 클럽이나 술집이 집중된 유흥가도 25일 자정부터 조용하다.

상업적 휴일이다, 합법적으로 선물을 갈취할 수 있는 날이다, 산타라는 괴도가 우리 지갑에 침투하는 날이다 등 크리스마스를 비하하는 말이 많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는 건 좋지만, 과도한 지출 때문에 버거워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이번 2014년의 크리스마스만큼은 길거리로 혹은 술집이나 파티장으로 가지 말고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건 어떨까. 모든 일상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는 곳에서 가족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해본다면 2015년은 더욱 특별해질 것이다.

※ 참고자료
<『상투의 나라』 L.H.언더우드, 집문당, 1999>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야화(1)』 이창성, 1990>
<『EBS역사채널e : 조선의 크리스마스』 EBS, 2013>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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