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역명 보니 부산 옛 모습 보이네
1호선 역명 보니 부산 옛 모습 보이네
  • 서영우 선임기자
  • 승인 2015.09.0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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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부산 도시철도 '장전'역은 긴 화살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화살, 바구니 등 대나무를 이용한 공예품을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철도 역 이름엔 부산의 역사, 지리, 문화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대학교 세 캠퍼스는 모두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을 지난다. 매일같이 등교하면서도 모르고 지나쳤던 부산의 도시철도 역 중 가장 이야기가 많은 네 곳을 선정했다. 역 이름의 유래와 거기에 얽힌 부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크고 새롭고 넓은 땅, 대신동

▲ 1950년대 대신동 모습(왼쪽). <사진제공=부산시 서구청>

대신동은 우리 대학 구덕캠퍼스가 있는 곳이다. '대신(大新)'이란 지명은 한새벌에서 유래했다. 1914년 보수천 공사 이후 일본인이 지금의 대신동에 많이 살게 되면서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했는데, 이를 한새벌이라 불렀다.

순우리말로 '한'은 '크다', '새'는 '새롭다', '벌'은 '넓은 땅'이란 뜻이다.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인 셈이다. 대신동은 1926년 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했다가 광복 이후 일제식 명칭인 정(町)을 바꿔 지금의 동으로 불리게 됐다.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대신동은 고분도리, 닥밭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옛날 대신동 자리에 있던 마을 이름에서 전해진 것이다.

닥밭골은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짜기를 뜻하며,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 고블(고리짝)과 드르(들)가 합쳐진 말로 '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란 뜻이 된다.

보수천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했다고 한다. 고려는 자신들에게 저항했던 옛 신라인들을 격리해 이 지역에서 버들고리짝을 만드는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후 인근 산에 자생하던 닥나무 또한 활용해 닥종이도 생산하게 된 것이다.

1987년 보수천 복개 공사로 인해 현재는 보수천과 버드나무의 흔적을 찾을 순 없지만, 닥나무는 아직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삼육부산병원(위생병원) 인근에 있던 닥밭골 마을은 도시화되면서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으나,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었던 고분도리 마을은 지금도 이곳 주민들이 고분도리라는 옛 이름을 쓰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1959년 꽃마을. <사진제공=부산시 서구청>

서대신동엔 꽃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와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당시 피란민들은 생계를 위해 꽃을 내다 팔았다. 국화, 카네이션 등을 재배해 부평시장, 국제시장까지 가서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꽃재배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구덕산과 승학산을 찾는 부산 시민들의 등산로 중 하나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대신동은 부산구치소가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896년 일본 수비대 연병장으로 쓰이던 부지를 1909년 부산감옥소로 만들었다.

이곳은 범어사 승려들과 학생들이 주도한 '범어사 3·1운동'의 주역들이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가뒀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부산형무소, 부산교도소로 명칭이 바뀌다 1973년 북구(현 사상구)주례동으로 옮기면서 부산구치소로 바뀌었다. 1976년 부산구치소 부지에 삼익아파트가 들어오면서 그 흔적은 사라졌다.

해수욕도 즐겼던 자갈밭 해안가

부산도시철도에서 가장 특색 있는 역명을 꼽으라면 자갈치역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대 수산시장인 '자갈치시장'이란 이름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지역에 자갈이 많아 자갈치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간척사업 전까지 남포동과 자갈치시장 부근은 자갈이 많은 해안가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이 해안가를 '남빈'이라 불렀던데 반해 조선인들은 '자갈치'라고 불렀다.

뒤에 붙은 '치'는 장소를 뜻하는 '처(處)'의 경남사투리 '치'가 합쳐져 지금의 자갈치가 된 것이라고도 하고, 어딘가의 끝자락을 뜻하는 '-치'가 붙은 것이라고도 한다. 매립으로 자갈과 해안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갈치라는 지명은 남아있었다. 그 터 위에 세워진 시장도 지명을 따서 '자갈치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동해 등에 분포하는 농어목 등가시칫과의 바닷물고기 '자갈치'에서 출발한다. 이 '자갈치'라는 물고기는 주로 활어로 거래된다. 활어를 주로 취급하는 자갈치시장은 이 생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갈치시장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보수천 하구 부분에 있는 이 해안가를 자갈치라고 불렀던 것을 고려하면, '자갈치시장'이란 이름의 유래도 전자가 조금 더 설득력 있다.

▲ 1910년 남빈(현 자갈치) 해안. <출처=부산자갈치축제 홈페이지>

1931년 일제는 남빈(지금의 자갈치-남포 지역)에 매축공사를 시행했다. 어업전진기지와 연안무역의 항만건설에 초점을 맞춘 매축공사의 결과로 자갈밭이 사라지고 근대적 항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실제로 자갈치시장을 방문하면 자갈로 덮인 해변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자갈치는 해방 후엔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들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전쟁 이후엔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각종 물자와 어패류를 팔았던 장소로 활용됐다. 이후 점차 확장돼 지금의 활기찬 자갈치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영도다리, 깡통시장과 더불어 자갈치시장 또한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부산을 지킨 문지기, 토성(土城)이 있던 곳

우리 대학 부민캠퍼스 근처에 있는 토성역은 이름 그대로 토성(土城)이 있던 곳이다. 현재 전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어 통역관 오다 이쿠고로가 1796년 쓴 『초량화집』에 토축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토성은 현재 부산대학교병원 앞 사거리를 중심으로 3~4천 평 정도의 면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이 축조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은 조선 시대와 삼국시대 설 두 가지를 내놓고 있다. 조선 시대 설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부대가 보수천을 거슬러 올라 구포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성의 모양을 주로 가야, 신라에서 축조하던 반월성으로 추정하고 있어 삼국시대 설이 조금 더 설득력 있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아는 성(네 방향 성문이 딸린 방형)은 삼국시대 이후에야 주로 축조된 형식이다.

하지만 모두 가설에 불과할 뿐 확신할 순 없다. 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조사 없이 각종 건물과 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본거류민단은 부산고등여학교(부산여고의 전신)를 현 경남중학교 자리에 신축하면서 성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토성초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현재 토성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비석마을로 유명한 아미동 중턱에 올라서야만 그나마 토성이 존재했던 자리를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곳이 토성으로 추정되는 구역이다.

토성의 중심은 사거리로 변해 차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밖에 남아있지 않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보다 규모나 인지도가 낮긴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자주 침략했던 왜구를 막기 위한 성으로 기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실제로 남포동 부근에 본격적인 간척사업이 이뤄지기 전, 토성 일대는 바다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4~5척(1.2~1.5m)이라는 낮은 성벽의 높이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공성 무기나 '나가에야리'라는 긴 창을 쓰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호랑이가 출몰하는 골짜기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범내골, 범일역 부근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과거 이 일대에는 범(호랑이)이 많이 출몰했다. 호랑이들은 수정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자주 나타났다.

이 때문에 수정산을 끼고 도는 동네 이름마다 범내골, 범천동, 범일동 등 모두 호랑이와 연관된 지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범일6동에서 범일1동으로 내려가는 계곡엔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울창한 숲이 있었다. 이곳에 범이 나타났기 때문에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내를 '범내'라고 불렀다.

이후 범내 주변으로 마을이 들어서면서 냇가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범내골'이라 지은 것이다. 범내골 시장통에 세워져 있던 '호천석교비'는 범내가 호랑이 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근거다.

범일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범천1리와 범천2리가 병합될 때 범천1리의 약칭인 범일동(凡一洞)을 동명으로 삼은 데서 유래했다. 지역명에 '모두 범(凡)' 자를 쓰는 것은 호랑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범에 맞는 한자 음을 맞춰 사용한 것이다.

▲ 안창마을. <사진제공=안창마을회관>

수정산 중턱에 안창마을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범일동 안에서도 가장 산과 가까운 마을이라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고 지금은 호랭이마을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곳이다. 안창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리면서 지금과 같은 마을을 형성했다. 그 이전엔 산림이 우거지고 커다란 바위와 물이 많아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 안창마을 벽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한국의 야생 호랑이는 공식적으로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멸종됐다. 그러나 안창마을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 말로는 50년대 이후에도 가끔씩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실제로 1969년 충북 영동에 호랑이가 나타나 개와 싸웠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에도 호랑이가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 참고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www.grandculture.net)
부산광역시청 홈페이지(www.busan.go.kr)
'한국의 성곽 축성기법과 변천과정', 김병희, 2012
'부산 자갈치시장 : 자갈처(處)에서 지명 유래, 부산의 빼놓을 수 없는 풍물시(風物詩)', 김기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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