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첫 10년을 말하다
동아 첫 10년을 말하다
  • 박상은
  • 승인 2016.03.0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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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교가 올해로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학 교육의 중심에 있던 우리 대학 개교 당시 첫 10년을 4명의 동문은 생생히 기억한다.
지난달 26일, 부민캠퍼스 인근 한 커피숍에서 박필룡(정치경제학과 5회 졸), 신상용(법학과 5회 졸), 정승용(법학과 5회 졸), 도상선(정치경제학과 5회 졸) 동문을 만났다.

 

 해방, 대학 설립은 시대의 부름

"중요한 건 해방 전 순 일본어로 공부했다 이거야. 그러니 해방되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어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민은 지식에 목말랐다. 조국의 문화와 언어를 되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나라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은 수준의 학문이 필요했다. 교육열을 충족하기 위해 대학의 탄생은 시대의 부름이었다. 정승용(91세) 동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해방 전에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편을 잡고 있었어. 해방되니까, 한국어나 이런 건 또다시 배워야 했거든. 그때 농촌에서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고 경남이나 근처 사람들은 죄다 부산으로 넘어왔지." 정승용 동문은 우리 대학에 들어오기 전 상황을 이같이 회상했다.

 우리 대학도 이 시기에 설립됐다. 석당 정재환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대학 설립 기성회가 만들어졌다. 기성회는 인가받지 못하고 있던 남조선대학의 수업을 이관받아 보강하고, 1947년 8월 재단법인 '동아학숙'과 '동아대학교'의 설립인가를 문교부에 신청했다. 같은 해 12월 30일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우리 대학은 법학부(법률학과)와 문리학부(문학과, 정치경제학과, 수학과, 물리학과)의 2부 5학과 인문과 대학으로 정식 출범했다. 정승용 동문은 "그때는 지금처럼 '이 대학 갈까, 저 대학 갈까' 고민도 안 했어. 그냥 더 배워야 한다, 그 생각밖에 없었지"라고 말했다.

 5회 졸업생인 정승용 동문이 학교에 들어온 것은 1949년이다. 1, 2, 3회 졸업한 선배들은 남조선대학에 다녔거나 일본에서 공부하다 학업을 중단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에 편입 시험을 거쳐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대학을 나오기 위해서는 중학교를 5년 다녀야 했다. 중학 3년을 보낸 후 전문부에서 1, 2년의 교육과정을 거친 뒤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박필룡(92세) 동문의 경우 전문부 1년 과정을 거친 뒤 학부에 들어갔다. 박필룡 동문이 처음 입학했을 때, 우리 대학은 현 부산일보 자리(동구 수정동)에 있었다. 일본이 유치원으로 사용했던 자리를 공생원이 이어 운영하고 있었고, 우리 대학이 이를 인수해 부속 중학교였던 동아중학교와 함께 운영했다. 학생들이 늘어나자 우리 대학은 자성대 남쪽에 있는 매립 터로 옮겨갔다.

 "그 위에 군수물자 보관하는 창고가 지어져 있었단 말이야. 그걸 우리가 인수해서 학교로 썼지. 그러다가 사람이 또 많이 늘어나니까, 동대신동으로 교사를 옮긴 거라. 판잣집이라고 하는 게 여기라. 동대신동 교사가 판잣집 교사였지." 박필룡 동문은 그 당시 옮겨간 교사 하나하나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우리 대학은 동대신동 지금의 구덕캠퍼스 자리에 처음 갔을 때 당장 큰 건물을 올릴 수 없어, 임시로 판잣집 교사를 지어 사용했다. 판잣집이란, 두꺼운 종이 상자나 판자로 사방을 둘러 벽을 만들고 지붕을 얹어, 대충 바람만 가리게 조성한 집이다. 이곳에 뿌리를 두고 건물을 하나하나 지은 우리 대학은 이후 승학캠퍼스와 부민캠퍼스를 짓고 보배캠퍼스까지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의자도 없었어. 책상도 다섯 명이 쪼르륵 같이 쓰고 그랬지. 전부 필기해서 배웠어. 책이나 유인물이나 그런 것 없이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거, 판서하시는 거 그게 다였지. 지금 학생들은 상상을 못 할 거야. 한문 같은 거 빨리 쓰려고 약자, 초서 이런 거 배웠다고." 박필룡 동문은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그 당시 같이 공부했던 교수들과 학우가 참 좋았다고 덧붙였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교수와 학생들은 힘을 합쳐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임시로 그어졌던 38선은 남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며 영구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학생들을 징집했다. 1949년 8월 6일 정부는 병역법을 공포했다. 의무병역제도와 징집 및 소집 등 병무행정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도 생겼다.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대학 학생들은 학업에 방해받지 않도록 병역법 제40조에 따라 만26세가 될 때까지 징집이 연기되었지만, 제76조에 따라 재학생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학도호국단 체제거든. 다른 대학은 그리 훈련이 안 심했는데 동아대는 유독 고된 훈련을 했어. 그때 전국 학도호국단장이 한남이라고, 유명한 사람이라.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인데 동아대 학생이었어. 그러니 훈련이 심했지. 욕본다고 하면서 다들 칭찬했어." 신상용(87세) 동문은 고됐던 훈련을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한국전쟁, 훈련과 학업 병행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저쪽 삼팔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밀려왔어. 여기 있던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을 못 했다고. 위보다는 무덤덤했지. 초량 그 앞에 바닷가 근처 부둣가에 석유제작 그런 게 많았는데, 저걸 폭격하면 초량 일대는 다 탄다. 그런 걱정을 했어." 정승용 동문에게도 전쟁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전쟁 상황은 남한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남한에서는 1950년 전시비상동원령이 떨어졌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후방 치안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입대를 면제받았다. 학생들은 자기 뜻에 따라 학업을 이어가거나 군에 자원했다. 단기훈련을 거치고 바로 전선에 투입되는가 하면, 학군관계 군관·문관으로 근무했다. 언어에 소질 있는 학생들은 UN군 기관에서 통역·번역 일을 맡았다.

 "젊은이들이 나라 강성이 되어 싸움터로 나갔지만 그래도 나라의 내일을 위해 교육만은 쉴 수 없다 해서 우리는 병력 징집이 보류됐지. 졸업 후에 모두 간부 후보생으로, 그러니까 소위가 됐지." 신상용 동문은 다시 말을 받았다.

 미군은 김해 비행장으로 들어와 부산에서 전쟁을 준비했다. 한반도의 끝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이 8월 16일경 임시수도로 정해졌다.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9·28 서울 수복으로 대학 강의가 재개되는 듯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흐지부지됐다. 1951년 1·4 후퇴로 피난민들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나라를 지키는 한편, 학업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남일초등학교 강당과 광복동의 동주여상 강당은 우리가 흔히 찾는 학문의 요람이었어.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부산으로 피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 선생 등 저명인사의 구국의 부르짖음도 경청할 수 있었고, 미네르바의 부엉이 울음을 기다리는 철학자의 절규 섞인 강연도 들을 수 있었지. 우리 젊은이들은 두 주먹 불끈 쥐기도 하고, 젊은 피가 솟구치기도 했어." 신상용 동문은 힘차게 말을 이었다.

임시수도 시절…
교육의 중심은 동아대

 문교부는 부산시민관에서 1951년 2월 12일부터 5일간, 2월 19일부터 5일간 각각 전시 문화강좌와 전시 과학강좌를 개설했다. 단기 강좌로는 학생들의 지식욕을 채워줄 수 없었다. 전쟁으로 정상적인 고등교육이 불가능해진 각 대학이 연합해 부산, 광주, 전주, 대전 지역에 전시연합대학을 설립했다. 우리 대학은 부산에 교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합대학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교수들은 연합대학에 출강해 전쟁 상황에서도 대학생들의 학문을 도왔다.

 도상선(91세) 동문의 경우, 동아대학교와 전시연합대학의 졸업장 모두를 가지고 있다. 도상선 동문은 "동아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지.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 내려왔잖아요. 지금의 부민캠퍼스 맞은편에 빈터가 있었어요. 거기서 전시연합대학이 만들어졌지. 서울 대학부터 다 연합이 되어서 우리 대학 교수도 출강하니까. 거기서도 듣고, 학교에서도 듣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대학은 1951년 10월 5일 한국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구덕산 기슭 현 구덕캠퍼스 위치에 임시 교사를 짓고 개강했다. 잔여 학생과 서울 피난 학생, 1·4 후퇴 후 이북 출신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피난해 온 서울대 교수들이 상당수 우리 대학 강의에 참여했다. 그 당시 한국의 정치 중심이 부산이었던 것처럼, 교육의 중심은 우리 대학이었다.

 "시험도 치고 다 쳤지. 강사들이 교류한 거지. 그러니까 동아대 학생들도 거기 가서 들을 수 있고 했지 뭐. 전시연합대학은 사실은 우리 대학의 수준보단 별로지. 전쟁 중 임시였으니." 박필룡 동문이 말을 받아 우리 대학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도상선 동문도 "어디 가서는 꼭 동아대를 졸업했다고 말한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국방의 의무도 계속됐다. 1951년 8월 26일, 대통령령 제649호에 의해 대학에 배속 장교를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우리 대학에도 5명의 장교단이 파견되어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매일 훈련을 했다. 한 학기 1주간은 야외 훈련을 했는데 우리 대학에서는 교정이 없어 주로 감천 백사장에서 했다. 이 같은 상황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동아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동아대학교 50년사:1946-1996』, 동아대학교, 1998.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인물과사상사, 2007.

〈참고자료〉
국가법령정보센터, www.law.go.kr


                                                                        〈글=박상은 기자〉
                                                                      〈일러스트레이션=전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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