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한 동아 70년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지금 학생들은 모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곧 닥칠 취업시장에 대비하여 무엇인가 준비하기 바쁘다. 대학이 취업의 장으로 변질되고, 그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편승하다 보니 갈수록 학교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고 있다. 우리 대학교는 한때 한강 이남 4대 명문 사학으로 불렸다. 현재 우리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모교에 관심이 없다면 이전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기는 힘들 것이다. 동아대학보는 개교 70주년을 맞아 연중 특집 기사 '역사와 함께한 동아 70년'을 연재한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학의 지난 70년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부산·경남 대표 명문사학의 시작
우리 대학교는 홍익인간이라는 건학 이념과 '자유, 진리, 정의' 교시를 바탕으로 1946년 11월 1일 개교했다. 해방 직전 당시 부산에는 '부산수산전문학교'라는 전문대학이 있었지만 식민 통치를 위한 수탈 교육기관에 불과할 뿐 한국인을 위한 고등교육 기관은 없었다. 극도의 수탈과 일제의 압박이 난무한 시대적 상황은 '민주시민의 자질을 길러 국가 및 인류사회의 발전과 정의 실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도적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목표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개교 이후 우리 대학은 부산·경남 지역의 대표 명문 사학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부산지역의 역사와 함께 발전했다. 현재 인재 양성과 산학 협력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고, 19만 동문이 사회주요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신상용(법학과 5회 졸업생, 1930년생) 동문은 "조무제 대법관, 박관용 국회의장, 예춘호 공화당 사무총장 등 우리 동아대 졸업생은 관계, 정계, 재계에서 입신출세한 분이 많았다"며 학생들에게 "인간관계, 믿음과 신뢰, 창의적인 지성을 키워달라"고 전했다.
'석당'이 설립하고 '한림'이 이어받다
대학생활을 하다보면 캠퍼스 곳곳에서 석당박물관, 한림생활관, 한림도서관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석당인재학부라는 우리 대학만의 특수학부에도 '석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는 '석당'과 '한림'이 우리 대학교 1대, 2,3,4대 총장의 호이기 때문이다.
석당 정재환 선생은 우리 대학 설립자다. 1906년 11월 1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에서 출생한 석당 선생은 일본입명관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하고 고등문관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1945년 11월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취임하고 전주, 대전, 대구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당시 석당 선생은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46년 11월 그는 동아학숙과 동아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생은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 재단의 터전을 다시 다졌고 대학 규모를 확장하는 등 갖은 노력을 쏟았다. 결국 1959년 2월 26일 우리 대학은 종합대학교로 승격됐다.
석당 선생이 고등교육에 투신하고자 했던 이유와 확신은 총장취임 식사에서 드러났다. "현하의 제반 정세를 조감할 때에 교육의 중요성과 교육 관계자의 직책의 중대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므로 종래의 지도 방침을 일층 강화하여서 인격 교육과 학술 교육의 병행을 목적하면서도 양자가 선진국 수준에 접근하도록 전체 동아 대학인은 매진하여야 될 것으로 봅니다." (1959년 4월 7일 '총장 취임식사' 중에서)
석당 선생의 장남 한림 정수봉 선생이 이후 2,3,4대 총장을 맡았다. 1961년 우리 대학 법정대학 조교수로 교육계에 몸담았고 1975년 총장에 취임했다. 한림 선생은 취임하자마자 대학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부산시 하단에 부지를 마련해 캠퍼스를 확장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기존 대신동 캠퍼스(현 구덕캠퍼스)에 있던 대부분의 대학과 본부를 승학캠퍼스로 이전하고 구덕캠퍼스는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등 메디컬 센터로 조성했다.
석당 선생과 한림 선생은 지방문화재의 발굴과 보호 등 한국의 문화발전에도 기여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의 문화재가 훼손되고 유출되는 것을 막고 한 곳에 모아 보호하기에 앞장섰던 간송 전형필만큼 석당 선생과 한림 선생도 민족 문화를 지키는데 온 힘을 다했다. 문화재 유출을 막기 위해 개인 재산을 들여 수집했고 문화재 발굴을 지원했다. 그 결과 우리 대학 석당박물관은 현재 부산 소재 대학박물관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석당 선생을 비롯한 역대 총장들을 기념하기 위해 구덕캠퍼스 석당기념관 2층에 설립자 기념실에 석당 선생의 유품과 역대 총장들의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다. 2012년 부산광역시
근대 건조물로 지정된 석당기념관은 건축 당시에 학장실과 초대 총장실 그리고 동아학숙 본부와 박물관으로 사용됐다. 현재는 동아학숙 본부와 설립자 기념실, 교사자료실, 고서(古書) 박물관인 석당함진재 등이 석당기념관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설립자 기념실과 교사자료실에 있는 각종 자료들은 아직 전시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학우들과 지역주민들에게 공개 전시하지 못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사립대학의 재정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대학에 비해 역사가 짧은 사립대학들도 학교역사관 및 기념관을 만들어 학교역사와 더불어 설립자 이념을 알리고 구성원들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심어주는데 앞장서는 중이다. 동서대는 2005년 당시 개교 40주년을 맞이해 '설립자 자료관'을 만들었다. 설립자 자료관은 관련 사진 600여점과 자료 1,300여 점을 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에 교사자료실 김승희 담당자는 "빠른 시일 내 전시시설을 설비하여 보관중인 자료를 분류별로 공개 전시함으로써 개교 이래의 대학 역사 조명은 물론 설립자 석당 선생의 인간상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1946년 11월 1일 개교한 우리 대학이 어느덧 70주년을 맞았다. 석당 선생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캠퍼스에서 정신없이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재학생들도 수많은 자랑스러운 우리 대학 동문들 중 한 명이 되어있을 것이다. 석당 선생의 교육이념이 우리 대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원동력이 되도록 다시금 새겨본다.
<참고문헌〉
석당 정재환, 『석당 일기』 , 산지니, 2013.
<사진제공〉
역사학 연구소, 한국 근현대사 박물관
<자료제공〉
동아대학교 석당기념관 교사자료실
〈글·사진 = 김승연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 전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