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부조리에 맞선 '동아의 10년'
사회 부조리에 맞선 '동아의 10년'
  • 조은진
  • 승인 2016.04.0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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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휴전 이후 우리 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당시 우리 대학을 다닌 나선길(대학원 정치학과 '60 졸), 이성만(농학과 '63 졸), 최상윤(국문학과 '69 졸) 동문을 만났다.

▲ 당시 대학본부 및 강당

한국전쟁 이후 종합대학교로 자리 잡아

 195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대학은 현재 구덕캠퍼스 자리에 교사를 마련하고 대학의 기초를 다졌다. 1956년 4월 25일에는 야간대학인 2부대학을 증설했다. 이 때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 상학과 등이 생겼다. 같은 해 5월에는 현역 장병의 입학을 위해 주간대학인 1부대학에 야간대학과 같은 학과를 설치했다. 대학원은 2년 뒤인 1958년 9월 18일 만들어졌다.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 영문학과, 물리학과, 농학과, 기계공학과 등 7개 학과에 석사학위 과정이 생겼다. 1958년 대학원 정치학과에 입학한 나선길 동문은 "당시 정치학과 대학원생은 2명이어서 강의실이 따로 없고 교수 연구실에서 수업했지만 그렇게 큰 불편은 없었다"고 전했다. 제1회 대학원 학위취득자는 입학 당시의 42명에 비해 6분의 1에 해당하는 소수였지만 제2회 이후로는 상당한 증가를 보였다. 박사학위과정 입학자 수도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인 증가추세를 보였다.
 

이와 같이 우리 대학은 부산, 경남 지역에 자리 잡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1959년 2월 26일 종합대학교로 승격됐다. 같은 해 4월 1일 정재환 초대 총장이 취임하며 한 걸음 더 성장했다. 학내기구가 확대되면서 본부 건물, 대학원 건물, 부속기관, 단과대학 교사 등을 신축·증축했으며 각종 학생시설들도 마련했다.

 

 
   
▲ 우리 대학 학생들이 국회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군부정권으로 혼란 맞은 대학가

 "내 공부 내가 하는 건데 제약을 많이 받았어. 북한에 관한 책을 읽으면 사상범으로 잡혀가니까 학문의 자유도 없고, 마음 놓고 공부를 할 수 없지." 최상윤 동문은 60년대 초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대학은 종합대학이 된 후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맞으면서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4월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학생들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군부는 대학의 정상적 기능을 마비시켰다. 저항은 거세게 일어났다.
 

1960년 4월 26일 300여 명의 학생과 100여 명의 교수들이 우리 대학에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시위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범시민적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치안이 불안해졌다. 학생들은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파괴된 건물을 정비하고 마비된 교통을 정리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요구했던 국회 해산이 흐지부지되면서 우리 대학 학생들은 1960년 5월 2일 다시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이날 시위에는 약 4,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동대신동-초량-부산진을 경유해 서면까지 진행했다. 이날 시위대가 행진을 계속하는 동안 동참한 시민들과 우리 대학 학생들은 2만여 명에 달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부산과 마산의 고등학교 연합체로 조직된 경남학생위원회가 발전한 것이 경남학생총연합회다. 1961년 3월 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우리 대학 제1강당에서 그 결성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64년 4월 19일에는 부산시 주최로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4월 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R.O.T.C. 학생들을 선두로 약 500여 명의 우리 대학 학생들이 부산시청 앞에 이르러 학원 사찰과 굴욕외교를 규탄하는 시위를 했다.
 

이성만 동문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했다. "군인들이 학교를 접수했어. 휴교도 했거든. 서부극장이라고 대신동에, 지금은 부산은행이 있는 자리야. 이 사람들은 방망이 차고 배지 달고 순찰하거든. 그 앞에 여학생하고 남학생이 걸어가는데 바로 꿇어 앉혀놓고 무릎을 때리는 거야. 그 정도로 그 사람들은 그랬어. 그 당시는 참 겁이 나더라고. 군인들이 적을 공격하는 건 그렇다 쳐도 우리 국민을 탄압할 때는…"라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최상윤 동문은 "그때는 학교가 성역이라 못 들어왔는데 박정희 정권 때부터 데모특별진압단이 교내까지 들어왔어. 일반 경찰하고는 완전히 다른 데모 진압반이지. 학생들이 교내에 숨을 곳이 없어서 교수 연구실로 뛰어 들어온 거야. 교수도 심각하다 싶으니까 캐비닛 속에 숨겨주는데, 들키면 사정없이 구둣발로 짓밟고. 그런 것이 박정희 시대 때 있었지"라고 말했다.

 

혼란 속에 출범한 학생자치기구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부패의 온상이었다.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임원들은 학교 대표로 대외활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내 학생활동의 각종 행사를 주도했기 때문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운영위원 선거에는 학생들의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고, 이를 둘러싼 부정과 잡음도 있었다. 학도호국단의 부패를 막고 학생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학생 스스로 학생대의원회를 만들었다. 학생들의 참여의식도 높아져갔다.
 

4월 혁명 이후 학도호국단은 해체되고 1960년 7월 4일 새로운 형태의 학생자치기구인 학생자치회가 결성됐다.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학생자치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여기에서 회칙과 학생대의원회 회칙을 제정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학생자치회가 발족됐다.
각 대학 단위로 학도호국단을 대신해 총학생회가 결성되면서 이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대한민국대학생 총연합회가 1960년 9월 12월에 결성됐다.
 

이성만 동문은 "총학생회는 집행부고 학회장은 대의원이야. 학회장은 대의원을 겸하면서 총학생회 감사권을 가지고 있는 견제 기구였어. 그러면서 대립이 되는 거지"라며 그 당시 학생회의 모습을 말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군사정부는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학생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사회 부조리에 맞선 대학생

 1950~60년대 당시 대학생들은 군부독재라는 부조리에 맞서 사회에 직접 뛰어들었다. 최상윤 동문은 "박정희 정권 때는 대학생들 다 자부심이 있었다고. 사회적으로도 대학생이라면 좀 봐줬어. 사회가 대학생을 신뢰하고 대학생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준 거야. 그런데 지금은 '로망'이 없어졌어. 대학생들한테 현실만 있는 거야"라며 "재벌이 돈이 안 되면 일자리를 안 만들어. 정부가 기업에 압력을 가해야하는데… 그렇게 하나. 우리 사회 구조가 이렇게 된 거지"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여전하지만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그 시절에 비해 많이 줄었다.

   
▲ 우리 대학 학생들이 학원 사찰과 굴욕외교를 규탄하고 있다

최상윤 동문은 "대학가도 사회의 못된 일을 가장 먼저 배워. 이제는 상아탑이라고 안 해. 옛날에는 사회하고 분리가 됐거든. 학생들도 영악해서 사회의 나쁜 걸 배워가지고. 우리 사회에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게 대학가에도 퍼진 거지"라고 안타까워했다. 덧붙여 "살아가다가 개선이라는 말, 적응이라는 말을 두고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할 때가 있어. 어디까지가 개선이고 어디까지가 적응이냐. 고쳐나가는 게 개선인데 현실에 너무 맞추면 적응이 돼버려. 지금도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많아. 개선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지금 그런 기운이 안 보여. 내가 보기엔 대학생들이 다 적응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우리 사회 도처에 퍼져있는 부조리를 하루아침에 확 엎어버리는 거야.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내가 젊으면 해보겠는데… 지금은 꿈꾼다고 할 거 아니겠어?"라며 "희망도 못 가져보나" 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빈부격차, 일자리 문제 등 사회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사회 혼란기에 대학을 다녔던 동문들은 7·80대가 된 현재도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을 놓지 않았다. 현재의 대학생들이 되돌아봐야 할 부분이다. <다음호에 계속>

〈글=조은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전은경 기자〉

<참고문헌>
『동아대학교 50년사:1946-1996』,
동아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동아대학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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