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발전과 함께한 사회 속의 동아대
부산 발전과 함께한 사회 속의 동아대
  • 박상은
  • 승인 2016.05.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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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하고 다 취직을 하는 거야. 나도 부산여고를 나오고 나서 1년간 취업해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야간으로 입학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 심부자(가정학 '67졸) 동문은 대학 입학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1967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강산이 바뀌는 시간 동안 대통령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독재정권 아래 우리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은 다른 시기에 비해 주춤했다. 한국은 6·25전쟁 이후 계속 빈곤했다. 당장 먹고살기가 너무 팍팍했다. 국민은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논리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 1970년대 당시 우리 대학 여학생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동아대학보 제 329호 (1976.3.15.)

야간대학의 전성기, 학업과 일 병행
 "그 당시 4년제 야간 대학이 동아대뿐이었거든. 부산에 공무원들이 매우 많았는데, 대부분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시험을 쳤어. 군인 같은 경우에도 간부후보생이라고 해서 고등학교만 나와서 16주 교육을 마치고 나면 장교가 되곤 했다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다 야간에 우리 대학 와서 공부했지. 직업을 달고 학교에 다니고 싶으면 우리 대학으로 와서 공부하는 게 꿈이었지. 많은 학생이 우리 대학을 다니면서 부산 지역에서 일했어." 정창식(토목학과 '70졸) 동문의 말에 따르면, 60·70년대는 '야간 대학의 전성기'였다.
 "나는 그 당시 ROTC를 했어. 오전에 수업 듣고, 오후에 훈련을 받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오면 야간 강의가 마칠 때였어. 학생들을 데리러 화물차 같은 군인 버스가 학교 앞에 10대씩 모여 있었지. 김해 공군부대에서도 오고, 진해 공군부대에서도 왔어." 주간 대학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더 열심히 공부할 힘을 주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60, 70년대는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시기였다. 농촌은 무너지고 사람들이 도시로 향하던 때였다.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산업화하면서 옛날 어른들처럼 농사지어서 전부 먹여 살리던 때와는 달라졌지. 남자 혼자 일하면서 전부 먹여 살리기 힘드니까. '남자가 온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차차 무너진 거야. 그렇게 직장을 가진 여성을 선호하는 풍조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지." 지금은 흔해진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던 시기를 심부자 동문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처음 가정학과에 들어왔을 때, 동기가 16명 정도 됐어. 가정학과니까 여자뿐이었지. 여기서 취업을 하겠단 생각으로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졸업 후 결혼을 했어. 입학한 본인이 결혼을 위해서 대학에 오진 않았겠지만, 어머니들의 생각은 달랐지. '대학을 보내면 똑같이 대학 나온 좋은 신랑감을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가정학과 나온 여자를 신붓감으로 선호하는 풍조가 사회적으로 있었어."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를 지낸 심부자 동문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사회 내 가정의 역할 변화를 가정학과의 변천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발전 거치며 전공 세분화·전문화
 1958년 2월 4일 우리 대학 문리학부에 가정학과가 신설되었다. 1962년 정규 2부 대학 인가와 함께 사라지고 복과 되는 등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1967년 1월 10일 석사학위 과정이 신설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가정학과는 여성의 대학진학이 흔하지 않던 시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과였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장래희망이 되었던 때, 가정학과 출신 여성이 신붓감으로 각광받았다.

 "내가 69년 교수로 왔을 때, 우리 대학 내에 여자 교수가 10명도 안 되었어. 여자 학과 하면 가정과, 음악과뿐이니까. 체육과도 한 사람이 있었고. 1991년 생활과학대학이 만들어지면서 초대학장 할 때 부산에서 여자 학장 1호였으니까, 여성의 사회진출이 얼마나 적었는지 알만하지"라고 심부자 동문은 말을 이었다.
"1980년대 들어 가정학과가 분화되기 시작했어. 가정학이란 테두리 안에서 의식주를 공부하다 보니까. 그 각각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요구가 나왔지. 식품전공이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고, 의류학과가 분화되면서 나는 의류학과 교수로 옮겨갔지. 그렇게 가정학과가 식품학과, 의류학과, 가정관리학과 이렇게 3과로 나뉘고 이걸 묶어서 가정 계열로 모집하다가 다시 학부제가 시행되면서 전공이 세분된 거지."

 2009년 6월 11일 가정학과는 가정관리학과에서 다시 아동가족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이는 한국 가정의 위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가정은 급격히 해체되고, 보육원이나 유치원은 필수가 되었다. 엄마가 해주던 밥은 학교 급식과 식당 밥으로 대체되었다. 더는 엄마가 설에 꼬까옷을 지어주지 않는다. 양말을 기워 신는 사람도 사라졌다. 2016년 현재 식품영양학과, 패션디자인학과, 아동가족학과는 각각 건강과학대학, 디자인환경대학, 인문과학대학에 소속되어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가정학과뿐 아니라 전체 학과가 세분화·전문화의 길을 걸었다. 정창식 동문은 "토목학과에서 건축, 도시계획, 조경, 환경공학, 공업경영학과가 떨어져 나왔어. 그래서 토목과 교수들이 도시계획과 가서 강의하고, 환경공학과 가서 강의했다"며 "우리 학생들이 캠퍼스 안에서 거의 살았어. 그때는 졸업하려면 160학점을 따야했으니 토요일도 정규수업으로 학교를 나갔어야 해. 지금 같이 주 5일제도 없었고 말이야"라고 대학 재학 당시를 회상했다.

 

각종 연구소 설치,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
 사회의 요구에 따라 과들은 세분되었고, 요즘은 다시 사회의 요구에 따라 통폐합되고 있다. 대학은 사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동아대가 세워지고 20년 동안은 대학의 기틀을 다져왔다면, 종합대학이 되고 굳건해진 이후 우리 대학은 사회와 함께 성장하길 바랐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맥을 함께했던 시기였다. 대학은 연구소를 설치해 사회의 발전을 도왔다. 우리 대학에서 1960년 10월 1일 첫 번째로 생긴 고전연구소는 한국의 문화를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과 닿아 있었다.
 

 1960, 70년대는 대한민국에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차례대로 실행했다. 1962년부터 66년의 1차 개발 당시는 농업생산력 증대와 에너지 공급원 확충, 수출 증대를 원했다. 이에 맞게 우리 대학은 1965년 5월 8일 농과대학에 한국농업기술연구소, 공과대학에 한국자원개발연구소와 한국공장관리연구소를 설치했다. 1966년 6월 13일 농과대학에 한국가축비육연구소를 세웠다.

 "60, 70년대 우리나라 전체에서 부산의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38% 정도로 높았어. 내륙에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내륙 운송비가 많이 들었고, 지금 같이 컨테이너도 없었기 때문에 부산에 수출 공장을 다 지었어. 합판, 신발, 섬유는 부산이 중심이었지. 부산도 경제가 좋았고, 동아대가 그 속에서 정점을 달릴 때라." 토목과를 나온 정창식 동문은 당시 부산의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며, 자신도 한국자원개발연구소 출신이라고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연구소가 많이 생겼는데 한 70%는 공대에 소속됐어. 한국자원개발연구소 같은 경우 부산시 발전을 위해서 부산시의 마스터플랜, 교통계획, 도시계획, 산업 재배치 계획 등을 세웠어. 부산의 근간을 거기서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라며 그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1967년부터 1971년 진행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식량 자금과 가족계획 추진에 의한 인구 억제 등이 목표였다. 이 시기 우리 대학은 1969년 10월 25일 학생지도연구소를 설치해 학생들의 지도 체계를 더욱 잡아가는가 하면, 1970년 3월 2일 사회개발연구소를 설치했다.

 1972년부터 1976년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고도성장 및 중화학 공업화가 목표였다. 그러나 이 당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문제가 대두하고 있었고, 우리 대학은 이에 주목해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소를 세웠다. 1972년 3월 2일 법경대학에 사회보장문제연구소, 1972년 5월 5일 한국공해문제연구소, 1973년 9월 19일 인구문제연구소와 도시문제연구소, 1974년 3월 1일 에너지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성장만을 위해 달려가기보단 우리 대학이 앞장서 도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 이후로도 연구소는 시대의 요구로 생겨났고, 또 없어졌다.

 우리 대학 연구지원실 정우철 실장은 "옛날이든 지금이든 인문과 기초과학 연구가 기본이 되는 것이 중요한데, 연구 인력과 공간, 예산을 끌어오기 쉬운 공대 쪽에 연구소가 치중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 음악다방, 음악감상실이 남포동 일대에 파다했다. 음학이 흐르던 시대였다. <동아대학보 246호 (1971.6.15)

교복·음악다방·동아리… 60,70년대 대학 생활
그렇다면 그 시대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어땠을까.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대학에도 교복이 있었어. 양복 같으면서도 고등학교 교복처럼 단추가 달렸었어. ROTC의 경우 거기에 보태서 사각모자를 썼는데, 내가 재학 중일 땐 계속 교복을 입고 다녔어. 70년대 후반에 가서야 교복이 없어졌지." 정창식 동문은 재밌는 것이 떠올랐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렇듯 교복 가격이 비싸다 보니까 남포동 양복집에 가서 비슷하게 맞춰달라고 하는 학우도 있었어. 나 같은 경우 엠티 가서 선배님들에게 교복을 물려받고, 교복 산다고 받은 돈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에 가서 평소 보고 싶던 소설책을 샀던 기억이 나." 정창식 동문의 머릿속에는 당시 남포동 거리가 그려지는 듯했다.

 "동아리에서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음악회를 했는데, 그걸 다 남포동에 있는 음악다방에서 했어. 음악다방에도 종류가 많았어. 오아시스, 향촌, 솔로몬, 칸타빌레 이런 것들이 있었지. 칸타빌레 같은 경우는 재즈, 샹송, 칸초네 같이 요즘 말하는 '올드 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어. 그거 외에도 클래식만을 전문으로 한다든지 많은 부류가 있었지." 그는 음악회 직전 40~50분 정도는 나이 많은 선배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이나 정치 이야기를 했다며 동아리 생활을 하면서도 진지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사회는 그렇게 흘러갔다. 60, 70년대는 가난과 경제개발, 도시화와 도시문제의 시대였다. 그 사이에서 우리 대학 학생들은 학문의 길을 걸어갔다. 그 당시 우리 대학이 있던 구덕은 부산의 중심지였다.
"그때는 부산지역의 중심이 중앙동, 광복동 이쪽이었어. 국제신문, 부산일보 같은 신문사나 시청, 도청 같은 정부청사가 다 거기 있었기 때문이야. 부민캠퍼스 건물이 예전에 도청 건물로 쓰인 건 알고 있을 거야. 모든 문화가 거기서 이뤄졌지. 동아대 구덕캠퍼스 입구가 모든 버스의 종점이고, 전차의 종점이었지." 정창식 동문은 구덕캠퍼스 정문에 대한 일화를 전했다.

 "이 시기 한참 쟁점이 되었던 게 구덕캠퍼스 공원화에 대한 거였어. 동아대가 원래는 동문을 정문으로 두고, 작게 있었어. 그러다 학교에서 바로 밑에 있던 구덕 저수지랑 지금 구덕 공원 쪽 일부를 1차로 사. 저수지를 매워 매립지를 만들었어. 그게 지금 의과대학이랑 정원이 있는 자리인데 그때 그 앞에 남문을 세워 정문으로 삼았지. 그리고 2차로 부지를 사려니까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힌 거라"며 학교 부지를 넓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왜 반대를 했냐면, 70년대 초에 아침 등산이 유행하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시민들은 등산을 해야 하는데 등산로를 막는다고 학교 측에 그러고, 학교 측에서는 왜 우리가 산 땅에 그러느냐고 서로 대립했어. 담도 쌓았는데 결국 무너뜨리고 공원으로 쓸 수 있게 했는데 학생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만약 당시 우리 대학 구덕캠퍼스 규모가 확장됐더라면 우리 대학은 또 어떤 형태로 변모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박상은 기자〉
〈일러스트레이션=전은경 기자〉

<참고문헌>
『동아대학교 50년사:1946-1996』,동아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동아대학교, 1998
『한국 근대사 산책』,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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