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동아의 민주항쟁
뜨거웠던 동아의 민주항쟁
  • 조은진
  • 승인 2016.06.0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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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우리 대학 학생들이 김영삼 당시 총재 (뒷줄 가운데)가 있는 신민당 당사를 방문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동안 우리나라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나라 내부에서는 빈부 격차와 도농 격차가 심해지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깊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게 된 10·26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 민주화 바람이 부는 듯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학가에는 다시 어둠이 드리워졌다.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군부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4월 혁명의 정신을 이어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대학 자율화에도 힘썼다. 하지만 1972년 유신정권은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4·19 혁명 이후 사라졌던 학도호국단 체제를 부활시켰고 학생 자치기구인 총학생회는 해체됐다. 학도호국단은 비상시 동원하기 쉽도록 군사조직처럼 편성돼 학생회 조직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은 생활고를 겪었다. 가발 제조업체인 YH무역은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줄이고 이듬해인 1979년 폐업을 선언했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은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강제 연행하고 기자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노조 집행위원장인 김경숙이 사망하고 김영삼 총재가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사건 이후 폭력 진압을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민의 불만은 부산과 마산까지 번져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 배포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일반시민과 중고생까지 합류해 조직적인 항쟁으로 발전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으나 투쟁은 마산까지 확산됐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부마항쟁에 참여했다. 10월 16일 동아대생 4,000~4,500명, 부산대생 3,000~3,500명과 일부 시민이 학교 주변과 남포동, 광복동 등에서 시위를 했다. 다음날인 17일에는 구덕캠퍼스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법학과 학생들과 운동장에서 교련수업 중이던 100~200명 정도의 학생이 '교련철폐', '유신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부산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군부정권은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부산에서의 항쟁은 식어가는 듯했지만 시위는 마산, 창원, 대구까지 확대됐다.

 부마항쟁 당시 교내 시위와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이용수 총학생회장은 19일 검거돼 영도경찰서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다. '오마이뉴스'가 전한 제32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이용수 동문의 여동생 이정숙 교수(고신대 식품영양학)는 "오빠는 엄청난 고문을 당한 후 말 대답은커녕 친한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잠을 자다가 희미한 불빛만 보여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날 정도"였다며 "후에 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해 혼수상태를 넘나들 때도 침대 옆의 보호대가 감옥의 창살 같다며 올리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문두열(토목공학 '81졸) 동문은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전 봄에 서울로 졸업여행을 갔는데 일정에 없었던 신민당사에 갔어. 돌아오니까 학장님이 수업시간에 뭐라 하시는 거야. 왜 당신 학교 학생들이 야당을 방문하냐는 말을 들으신 것 같아. 당시는 걸어가도 끌려가고 감금하는 시절이었는데, 보직 교수에게는 굉장히 치명타였지"라며 "10·26사건 지나고는 길거리에 군인과 형사들도 있고, 지나가다 부딪히면 맞고. 휴교령이 내려져서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 시위 주동 학생들 색출하려고 학생들 무작위로 잡아서 신분증 내라 하고, 택시 타고 가다가도 세우고 보여달라고 해"라며 당시 긴장상황을 전했다.

대학 자율화에 대한 열망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면서 학도호국단이 부활해 대학의 자율화는 후퇴의 길을 걸었다. 우리 대학은 1980년 3월 19일 학도호국단 대표 선출 방식을 바꾸는 개정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대표 선출 방식만 바뀌었을 뿐 학도호국단 조직은 유지됐다. 1980년 4월 2일 학생회장 선출이 간접선거로 진행되자 200여 명의 학생들이 문과대에서 시위를 열었다. 시위는 농과대로 이어졌다.
제5공화국은 1983년 12월 21일 제적학생 복학 허용, 구속학생 석방 등을 내세운 학원 자율화 조치를 취해 대학 내에 상주해 있던 경찰을 철수했다. 이후 각 대학들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등의 기구를 결성해 군사정권의 탄압수단이 됐던 강제징집, 졸업정원제 등의 철폐를 요구하고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84년 전국의 각 대학에서 대학 자율화를 요구하며 학도호국단 체제를 거부하고 총학생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우리 대학도 비상학생총회를 만들어 총학생회 부활을 시도했다. "1983년부터 암흑기가 왔지. 그 당시는 학도호국단 체제라 학생회를 공식적으로 못 만들게 했는데 몇몇 대학은 학생들 힘이 있어서 총학생회가 부활했어. 우리도 학도호국단을 장악하려고 1984년부터 학생회 부활 운동을 했어." 당시 비상학생총회 회장이었던 박재율(정치외교학 '95졸) 동문은 이렇게 전했다.

 그 해 3월 12일 구덕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이 비상학생총회를 열어 '비상학생총회에 부쳐'라는 유인물을 낭독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는 승학캠퍼스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박재율 동문 등 5명이 제적되고 3명이 무기정학 당했다. 박재율 동문은 "제적당하고 나서도 학교에 계속 나와서 당시 구덕캠퍼스 도서관 앞 광장에서 계속 집회를 했어. 당시 학생들은 억압 체제에 나서지는 못해도 속으로 저항하고 있어서 우리를 지지하고 도움도 많이 줬지"라며 "학원자율화를 추진하는 시위를 계속하면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교수들이나 학교의 주목을 받았어. 경찰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금서(禁書)였던 책도 뺏아가고, 부모님이나 고등학교 선생님들에게까지 전화해서 나를 말리라는연락을 했어"라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되찾은 학생 자치권, 총학생회 부활

정부는 대학 자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1985년 학도호국단을 폐지했다. 그 해 4월 15일 총학생회 직접선거가 이뤄졌다. 대학의 민주화를 위한 관심과 열기로 71.3%의 높은 투표율을 보이기도 했다. 박재율 동문은 "영남 지역에서 우리 대학 총학생회 가 처음으로 부활했어. 그래도 우리는 제적생이라 제약을 받아서 삼민투쟁위원회(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이념의 실현)를 만들어 활동했지"라며 "1985년 5월에 5·18 민주화 운동 기념행사 때 구덕캠퍼스 앞 라면집에서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잡아갔어. 부산역~부산진역 사이 대공분실에 잡혀가서 취조를 받았지. 읽은 책 다 쓰라 하고 사상도 체크해"라며 억압 받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승학캠퍼스에 남아 있는 6월 항쟁도 <동아대학보 제 1111호 (2014.05.12)

승학캠퍼스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6월항쟁도'는 항쟁 과정에서 숨진 이태춘 동문을 추모하고 민주화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6월항쟁을 기념하고 '통일된 해방조국'을 염원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전해진다. 우리 대학 이태춘(무역학 '86졸) 동문은 1985년 6월 18일 민주화를 위한 시위 과정에서 숨졌다. 박재율 동문은 "시위 과정에서 진시장 육교에서 떨어져 죽은 이태춘하고 중학교 동기였어. 80년대 학생운동할 때 만나서 힘내라고 악수도 했는데… 학교 졸업 후였는데도 시민의식을 갖고 있었지"라고 전했다. 공권력에 의해 훼손된 그림이 많아 후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6월항쟁도는 사료적인 가치와 작품적인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2007년 총학생회에서 6월항쟁도를 철거하려고 해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문헌>
『동아대학교 50년사:1946-1996』, 동아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동아대학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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