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사라진 시대다. 그 빈자리엔 불신과 혐오가 자리했다. 성별 혐오를 뜻하는 이른바 '여혐(여성혐오), 남혐(남성혐오)'과 '관종(관심종자)'이라는 용어의 대두는 물론이거니와 본인 스스로의 태생마저 조소하며 '수저론'을 언급하는 형국이다. 도무지 눈 둘 곳을 찾기가 어렵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혐오를 거듭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가. 혐오는 타인에 대한 반응의 한 갈래이자 본인 투사의 산물이다. 넌센스적인 이 문장은 타인, 그리고 관계의 문제로 얼마간 해소할 수 있다.
팝아트의 창시자 앤디워홀은 평범한 일상용품의 복제를 전시관에 들여놓음으로써 진절머리 나는 일상의 예술화를 꾀했다. 그가 던진 화두는 명백하면서도 체감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일상의 평범함 혹은 징그러움 속에서 밝게 빛나는 어떤 한 순간을 포착해낼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떠한가. 껌 하나를 사더라도 시장경제원칙에 복무해야 하고, 스스로의 경영자로서 부지런히 스펙을 쌓아야 하는 등,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면면들. 그것이 우리의 형상이자 이름이다. 두런두런 곁을 둘러볼 시간은 없다.
또 하나, 근대 문학(예술)의 종언을 고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는 본인 욕망의 잣대로 서 있을 대상으로서의 타인이 필요한 자폐시대이다. 형상뿐인 타자들로 둘러쌓인 이 분열시대 속에 진정한 관계는 실종되었고 가열하는 경쟁만이 살아남았으며 우리는 전체를 위한 동력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동하는 사람들'로서 연명하는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타자로 나아가려 했던 기존의 관계 노력은 끝이 났다. 그러나 끝은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암시한다.
현대예술과 현대철학이 말하는 '단독적인 타인(타아)', '관계', 무엇보다도 참된 나의 형상과 이름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소통의 길을 닦아나갈 수 있지 않은가. 바삐 길을 걷다가도 한 무덤의 들꽃을 보고 새삼 옆 사람의 삶의 자취를 전해 들으며 흔쾌히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곁을 둘러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혐오가 아니라, 정말로 소통, 단 하나뿐인 타인이 절실한 때이다.
정유종 독자위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4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