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넘어 화합과 소통의 길로
갈등을 넘어 화합과 소통의 길로
  • 김동빈 기자
  • 승인 2016.09.0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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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를 휩쓴 민주화의 물결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학생들은 결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권위주의를 내세운 독재정권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학생들은 학내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야 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각자의 대학에서 학내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우리 대학교도 이 바람을 따라 나아갔다. 학내 민주화와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일어난 논란, 등록금 협의 등 수많은 진통을 겪으며 우리 대학교는 한층 더 성장했고 올해 드디어 개교 70주년을 맞이했다.

학내민주화를 향한 길
 1980년대, 모든 사회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기였다. 우리 대학 학생들도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대학의 민주화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87년 5월을 기점으로 시위는 심화됐다. 총학생회 부활 이후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쟁취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정수봉 총장의 퇴임을 요구하고, 학교·교수·학생으로 구성된 3자협의회를 제안했다. 결국 1988년 11월 4일 정수봉 총장이 교수평의회와 3자협의회 구성 등 5개 항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태는 진정세를 보였다. 1989년에 처음으로 교수들의 투표를 통해 제5대 신순기 총장이 취임했다. 당시 학보사 기자였던 박진우(체육학 '94졸) 동문은 "신순기 총장은 여러 면에서 민주적이고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총학생회의 출범식에 보직교수와 함께 와서 축하 말씀을 해줬고, 총장임에도 강의를 하나 맡아서 학생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제5대 신순기 총장(오른쪽)의 취임식. <동아대학보 제675호(1989.1. 16)>

 그러나 3자협의회는 시작하자마자 어려움을 만났다. 1990년, 총학생회와 학교 간의 합의가 이뤄졌지만 곧바로 논란이 일어났다. 등록금 인상을 합의했으나 학교와 학생 측에서 각자 이의를 제기하며 합의를 뒤집었고, 학생과 학교의 일방적인 대화에 대의원회가 반발했다. 여기서 총학생회가 사퇴한 전 총장에게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양심선언이 동아대학보를 통해 발표됐다. 수차례 탄핵 요구에 결국 출범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탄핵당했다. 불만을 품은 총학생회장은 총장실을 점거하고 보궐 선거를 방해하거나 학보사에 난입하는 등 학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학보사에서 활동하던 최종숙(신문방송학 '94졸) 동문은 "탄핵당한 총학생회는 학보에 불만을 가지고 학보사에 난입해서 소란을 부리기도 했고, 승학캠퍼스 정문 앞에서 발행된 학보를 쌓아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며 "학생회와 여기자들이 다투는 사진이 학생들에게 공개되면서 공분을 자아냈다"고 말했다. 동시에 학교와 의견을 같이한다고 의심받던 '학내 비리 척결을 위한 정화위원회'가 폭력활동을 벌이면서 논란을 키웠다. 학생 간의 분열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이 학생회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학생들은 전교조 활동, 노동조합, 남북문제 등의 다른 사회문제로 관심을 기울였다. IMF를 거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재는 점점 사라졌고, 민주화 투쟁이란 주제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1992년 9월, 승학캠퍼스 정문 앞에서 벌어진 대재단 투쟁. <동아대학보 제762호 (1992. 9. 14)>

사립학교법 개정과 갈등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의 자주성과 공공성을 위해 사립학교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정치적인 이유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여러 차례 개정됐는데 그 중 1990년 4월 7일 개정된 내용이 논란이 됐다. '이사회를 구성할 때 구성원 간 친족관계나 배우자의 3촌 이내 혈족관계에 있는 사람은 정수의 3분의 1을 초과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5분의 2'로 완화됐다. 이와 더불어 총장임면권, 교사임면권, 예결산 심의 등 대학에 대한 여러 권한을 재단에 부여했다. 개정안은 '사학에 대한 행정감독권을 줄여서 사학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것이 목표였다. 학생 측과 교수 측은 재단의 개입 없이 대학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재단에 요구했다. 그러나 재단은 사립학교법을 따랐다. 이사회는 1992년 7월 24일 '학칙변경 시의 유의사항 시달'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것은 학교행정에 대한 중요사안을 이사회의 사전 심의와 결정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과 일부 교수진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서 얻은 민주적인 행정을 재단이 독단적으로 관여하게 됐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서 우리 대학의 총장선출제도 변화를 겪었다. 개정된 사립학교법과 우리 대학의 총장직선제가 충돌하면서 여러 차례 갈등이 생겼다. 이 때문에 1998년 총장직선제가 폐지되고, 법인이사회가 총장을 선출하는 총장간선제로 바뀌었다. 학교법인은 "이사회의 민주적인 운영과 공정, 투명한 작업을 통해 총장을 임명하겠다"며 입장을 밝혔지만 학생들과 일부 교수진은 재단의 영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대학 구성원이 의사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재단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불만이 쌓이기만 했다. 2004년에 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발표됐다. 대학평의원회 설치 의무화, 이사회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한 외부이사제, 이사회 회의록 공개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사립학교법은 재단에게 권한을 주는 한편 대학 구성원의 의견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 2012년 5월, 학생들이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3보 1배를 하며 대학본부로 향하고 있다. <동아대학보 제 1095호 (2012. 5.7 )>

등록금 인하 투쟁과 등심위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던 주제였다. 이 문제는 흔히 우골탑(牛骨塔: '가난한 농가가 소를 팔아서 번 등록금으로 쌓은 탑'이란 뜻, 대학을 비꼬는 단어)이라는 표현으로 비유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인골탑(人骨塔: '사람의 등골을 뽑아먹는다'는 의미, 우골탑에서 파생된 신조어)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학생에게 큰 부담으로 발전했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1989년 3자협의회가 생긴 이후 학생대표를 통해 등록금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 설치를 권고하면서 2011년부터 3자협의회가 사라지고 등심위에서 등록금을 정하게 됐다. 대학가는 매년 초가 되면 항상 등록금 문제로 시달렸는데, 우리 대학도 그랬다.

 우리 대학이 최근 등록금 문제로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미친 등록금의 나라'라는 화제가 떠오른 2012년이다. 2011년 6월에 일어난 반값등록금 촛불시위는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이 과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그로 인해 교육과학기술부가 등록금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고, 그 여파로 2012년 대부분의 대학들이 등록금을 인하하거나 동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 대학도 등심위를 통해 등록금을 3.2% 인하했다. 그러나 총학생회가 요구한 수치(15%)보다도 낮았고 다른 사립대학(5~6%대)에 비해서도 인하 폭이 낮아 총학생회 측이 불만을 표현했다. 2012년 당시 등심위 위원으로 참가했던 강은혜(사학 '14졸) 동문은 "그 때는 등심위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학생회 안에서도 의견이 갈려서 힘들었다. 학교와 학생 사이의 소통도 잘 안됐다. 위원회를 구성할 때 학생 측 위원과 학교 측 위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외부 위원인 세무사를 누가 선정하느냐 등의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당시에 학교와 의견을 같이하는 위원이 과반을 차지해서 학생 측의 불만이 많았다. 학생 측은 참여만 했다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총학생회 측은 학생총회를 열어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그 지지를 통해 등심위를 다시 열려고 했다. 3월 22일, 학생총회는 당시 전체 학생 수의 10분의 1을 넘는 재학생 2,129명의 서명을 모으며 힘을 얻는 듯했다. 하지만 학생총회에서 가결된 학생들의 요구는 서명인원과 안건 발의 당시의 인원 차이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후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이 등록금 재협상과 등록금 11% 인하를 목표로 4월 3일부터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다. 강은혜 동문은 "당시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이 텐트를 치고 단식을 했다.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많이 도와줬다. 특히 신입생들이 많이 도와줘서 감동적이었다. 물과 쪽지를 건네면서 힘내라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등심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학교와 학생 측은 서로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등록금 논의를 거쳤다. 학생과 학교 측의 비밀회의라는 의견이 나오자 등심위 회의록을 우리 대학 홈페이지에 게시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전부터 학교 안의 논란은 항상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생겼다. 학내민주화, 사립학교법 개정, 그리고 등록금 문제 모두 소통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됐다. 대학 구성원인 학생과 학교, 그리고 재단이 서로를 존중하며 활발한 대화를 하는 모습이 중요하다. 문제가 해결될 때는 항상 활발한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끝>

<참고자료>
『동아대학교 50년사:1946-1996』, 동아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동아대학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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