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의 날'을 아시나요?
'순국선열의 날'을 아시나요?
  • 조은진
  • 승인 2016.11.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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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1월 17일은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이다. 그런데 이 날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다. 바로 '순국선열의 날'이다. 국민들 대다수에게 법정공휴일인 현충일은 익숙하지만 순국선열의 날은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지난 2013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국가보훈처가 '11월 17일이 순국선열의 날이란 걸 아셨나요?'라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몰랐다'는 대답이 주를 이루었다. 국민 대부분이 6월 6일이 현충일이라는 것은 알더라도 현충일이 정확히 무슨 날인지, 순국선열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에 따르면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희생정신과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자 정한 기념일이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기념일을 정했다. 그 후 1997년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순국선열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애국지사', '순국선열'이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한 의미를 말하라고 하면 쉽지 않다. 국가유공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 △4·19혁명 과정에서 상해를 입었거나 사망한 사람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 △국권 상실 이후 광복에 공헌한 사람 및 국토방위에 공이 많은 사람 △나라를 위하여 공헌하거나 희생한 사람 등을 통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법률 제4856호)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만을 의미한다.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8·15광복 전날까지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항거한 사람들이고, 순국선열은 항거로 인해 순국한 사람들이다.

▲ 부산 서구 부민동 한형석 독립유공자의 집

 

부산·경남 지역 유공자의 활약상

 1918년 신한청년단 가입 후 1919년 2월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1881.1~1950.12.)은 부산 출신이다.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었고 1919년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한국 독립의 타당성과 필연성을 호소했다.

 김규식, 이시영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장건상(1882.12.~1974.5.) 역시 부산 출신이다. 그는 1928년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 2015)의 모티브가 된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주도한 박재혁(1895.5.~1921.5.)과 최천택(1896.6.~1962.11.) 두 사람은 부산공립상업학교 동기동창으로 의열단원이자 역시 부산 출신이다. 박재혁은 1920년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서장을 사살할 계획을 했다. 같은 해 9월 부산에 상륙한 후, 경찰서장을 찾아 폭탄을 던져 체포됐다. 1921년 3월 사형이 확정된 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고문과 폭탄의 상처에 폐병까지 생겨 단식하다 형 집행 전에 옥에서 순국했다. 최천택도 이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으나 박재혁이 단독 거사라 주장해 풀려났다. 이후 부산청년연맹 위원과 신간회 부산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과 구금, 구속 생활을 이어가다 경찰서 안에서 광복을 맞았다. '신혁명군가', '한국행진곡', '항전가곡' 등 항일가곡을 작곡하고 '국경의 밤', '아리랑' 등을 공연해 항일의식을 고취한 한형석(1910.2.~1996.)과 비밀독서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끈 차병곤(1928.5.~1945.9.), 정오연(1928.4.~1945.5.) 역시 부산 출신의 독립유공자다.

 

▲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 전날 박재혁(좌)과 최천택(우)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출처 = 부산출신독립투사집 (1983)>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던 시절 가부장적인 남녀불평등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있다. 김해 출신인 김필수(1905.4.~1972.12.), 김원봉의 부인이자 부산 출신인 박차정(1910.5.~1944.5.) 등이다. 김필수는 1926년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해 독서회와 웅변모임 등을 조직했으며, 이 모임으로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항일민족독립에 관한 선전활동을 했다. 박차정은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해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 체포됐다. 1930년 2월 중국으로 망명해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됐으며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사망했다.

 우리 대학교 양미숙(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동문은 지난해 12월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에서 "독립운동사, 사회주의운동사를 보면 여성운동가, 활동가들의 자료를 추적해서 비워져있는 부분을 운동사적인 측면에서 메꿔야 하지만 지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출신학교나 조직이 다른 경우는 있지만, 활동범위나 활동내용은 남성 독립운동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자료에서도, 서술에서도 드러나 있지 않아 조사가 되고 서술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 부산 서구 부민동 한형석 독립유공자의 집

유공자들의 암울한 현실

 지난해 봄 부산시가 광복회 등과 함께 시행한 독립유공자 실태 조사에 따르면, 부산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440여 명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시는 독립유공자를 대상으로 환경개선 사업을 실시하는 등 지원을 하고 있지만 유공자들이 겪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부산지방보훈청의 지난 2013년 7월 기준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생활등급별 현황을 살펴보면 독립유공자와 유족 절반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보훈처가 도시근로자 가계비 추계자료에 근거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생계유지층은 47.2%, 생계곤란층은 2.1%로 나타난 반면 생활에 여유가 있는 상층은 9.4%에 불과했다. 2004년 통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6명이 무직에 고졸 이하 저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난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유공자들의 희생으로 국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광복을 이뤘지만, 유족에게 적절한 보상과 지원은 주어지지 않았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 부산 중앙공원에 있는 최천택 기념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을 역임했던 우리 대학 홍순권(사학) 교수는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안 된 것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미흡한 대책이 독립유공자 후손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부산디지털대 이윤수(사회복지상담학부 복지상담학) 교수는 "사회복지학에서 '사례관리(case management)'라고 하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개별적으로 관리해 맞는 서비스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유공자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는 의식적인 부분을 존중해주면서 정책이나 행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체계화된 시스템과 제도, 혜택들이 불공평하지 않게 보장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열악한 삶을 살아가는 건 독립유공자뿐만이 아니다. 공무 중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도 국가유공자로 분류된다. 정부는 공무 중에 청각장애를 갖게 된 유공자에게 보청기 등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하지만 지난 7월 중앙보훈병원이 의료기기 창고 내 부품 보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논란이 인 적 있다. 보훈병원에서 지급하는 보청기 중 상당수가 오래된 재고 부품으로 만들어 잔고장이 잘 나는 것으로 확인돼 난청과 이명으로 고통받는 국가유공자들은 실망을 표했다.

 지난 2010년 6월 대구지방보훈청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유공자 사진 및 치매예방 작품전시회'를 개최했다. 김차희(당시 83세) 할머니가 글을 출품했는데 1950년 동아대 법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故) 성복환 동문의 부인이다. 고 성복환 동문은 1950년 8월 학도병(당시 20세)으로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 후 미 77포병대에 배속돼 2개월여 만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을 잃은 후 평생을 수절해온 김차희 할머니는 그리움이 담긴 서한문 형식의 글 '60년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로 아픔을 표했다.

 정부의 건국절 제정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 하시마 섬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강제 징용을 부정하고, 제대로 된 사과 없이 10억 엔으로 위안부 문제를 무마하려는 일본의 모습은 유공자들을 더욱 아프게 한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이윤수 교수는 "유공자 개인마다 (생활에)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가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 6월 보훈의 달에만 잠깐 관심을 가지고 평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다. 유공자들은 경제적 지원보다는 관심과 예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순권 교수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라를 뺏긴 과정에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지만 300년도 채 안 돼 다시 침략 당했다. 역사는 반복되고 시간이 지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글·사진 = 조은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 신예진 기자>

참고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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