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기자도 기자가 쓴 기사에서 언급된 혐오 표현들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입에 붙어버려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단어도 있다. 일부러 말을 더듬으면서 친구랑 웃으며 논 적, 얼굴 구기기로 엽사(엽기사진) 찍은 적, '병신'이나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욕설로 사용한 적, 식당에서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는 아이엄마에게 '맘충'이라고 한 적,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이를 나쁜 시선으로 본 적. 모두 있다. 누군가 나에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혐오 표현이다'라고 말을 해줘도 '나는 그런 의도로 한 게 아닌데?'라며 가볍게 넘겨버렸다.
기자가 했던 말들이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는 페미니즘이었다.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여자애 방이 이게 뭐니?', '여자애들은 얌전하고 싹싹한 면이 있어서 좋아'라는 말이 지금까지 왜 여자인 기자에게 불편하게 다가왔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서, 기자의 행실을 반성하게 됐다. 개개인을 고유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특정한 연령이나 성별에 가둔 채로 대하는 것, 소수의 사람들로 인해 그 연령층 자체를 '혐오'하는 것, 그리고 '여성', '어린이', '노인'임을 강조하는 단어를 만들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것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증오범죄에 대한 뉴스 보도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말 한 마디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엄청난 사건이 우리를 만들기 보다는, 사소한 일상들이 모여 우리를 만든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말'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 한 마디가 우리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누군가는 또 기자에게 '진지충'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진지충'이라는 단어가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럴수록 기자는 더욱더 심한 '진지충'이 될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일상 속에서 혐오를 마주한다. '나(우리)는 안 그러는데?', '이런 얘기 처음 들어봐' 또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 아니야'라는 말로 상대방의 상처를 무마하려 하지말자.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 기득권층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 스스로가 판단해야 할 문제다. 오늘도 당신의 일상이 누군가에겐 혐오 표현으로 다가 왔을 수도 있다.
안다현 기자
1600353@do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