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기고] 세상에 깔린 망(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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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보편집국
  • 승인 2013.04.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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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종 교수 독어독문학

눈을 뜬다. 신문을 펼쳐 든다. 멀리서 날아든 소식이 기분 좋은 하루를 알린다.
"류현진, 던질수록 '괴물본색'"(경향신문, 2013.3.25.)
신화 속의 외눈박이 괴물도 아닌데, 그는 괴물로 불린다. 은유다. 우리의 일상에 녹아든 이러한 표현은 수사학의 일면을 보여준다. 눈을 크게 뜨면, 보이는 것이 또 있다. '괴물본색!' 기자는 이 표현에 작은따옴표를 쳤다. 그 무엇을 떠올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1987년에 수입되어 상영된 홍콩 영화 <영웅본색>이 아니고 무엇이랴. 신문의 표제어는 이 영화제목의 일부를 대체하고 있다.

생각나는가?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베를린을 방문하여 연설한다. 당시 구 동독 지역에 있던 베를린은 역사상 유례가 없게도, 4대 강국인 미국·소련·영국·프랑스의 분할통치 하에 있었다. 이 고립된 '섬'으로 날아든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에서 연설한다. "2,000년 전 가장 큰 자랑거리는 'civis Romanus sum'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Ich bin ein Berliner'입니다." 앞의 라틴어 표현은 '나는 로마시민이다', 뒤의 독일어 표현은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뜻이다. 당시 로마시민은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현지법이 아니라 로마법의 적용을 받았기에 로마시민인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이를 독일어로 옮기면서 케네디는 '로마'를 자유의 최전방이자 방문지였던 '베를린'으로 대체한다.

영어로 된 연설에서 이 두 문장만 외국어 표현인데, 그는 과거의 말을 떠올려 일부를 대체하는, 이른바 '인용법'을 실현하고 있다. 물론 신문의 표제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대체가 아니라 부분 대체이다. 수사학에서는 이를 텍스트 상호 간의 일탈무늬로 다룬다.

문학작품을 읽는다. 구효서의 『그녀의 야윈 뺨』. 대학까지 나온 주인공은 을씨년스러운 지하창고에 사글세로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 모양으로 사는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묻는다. 그때 주인공의 대답. "연극배우올시다, 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금방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먹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건진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대답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서, 효과적인 게 아니라 효과적인 것 같아서, 난 그렇게 대답한다."

주인공은 왜 이 대답이 효과적인 것 같다고 판단할까? 왜 사람들은 주인공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까? 여기에 대화의 논리가 숨어 있다. 그 사람들은 연극배우라는 직업에 모종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른바 배고픈 직업이라는, 그래서 주인공도 그 직업에 종사하니 궁상을 떨며 살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 도입한 삼단논법, 이른바 다음 '수사적 삼단논법'이 작동하고 있다.

대전제: 연극배우는 대체로 가난하다.
소전제: 나는 연극배우다.
결 론: 고로 나는 가난하다.

대전제를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한 주변사람들은 생략된 결론을 추론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전제에 들어있는 '대체로'란 표현이다. 연극배우 모두가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가난하다는 사회적 통념을 참으로 받아들일 때, 오직 그때에만 명시된 결론을 추론할 수 있다. 주인공은 이를 토대로 한 '수사적 논증'을 실현시킴으로써, 소통방식의 유효성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논리와 표현, 이것은 수사학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전문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설득적 사고의 실마리를 잡는 '착상'과 이 생각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표현'은 2,500여 년의 수사학 역사에서 번갈아 주도권을 잡으며 수사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언급한 것만이 예들이 아닐진대, 세상에는 수사학의 유비쿼터스 망이 쫙 깔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양태종(독어독문학) 교수

 

동아대학보 제1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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