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2주년 기획│동아대학보 1160호의 걸음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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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대학교 다우미디어센터
  • 승인 2020.06.1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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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 학생 운동을 조명하다

민주화 이전, 대학가는 학생 운동으로 떠들썩했다. 변화를 갈망하던 학생들은 길거리로 나가 '민주화'와 '자유'를 외쳤고, 이 외침은 우리 대학교를 넘어 부산 일대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본지 학생기자들은 발로 뛰며 그날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서면]을 활보하는 <데모>에서 …

당당히 드높은 동아의 기세를 백만 부산시민에게 과시하였다

▲6월 항쟁 당시 학내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모습
▲6월 항쟁 당시 학내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모습

위 문장은 4·19 혁명 당시, 본지 제57호에 실린 '본교 학생들 「데모」를 감행'이라는 기사 중 일부다. 4·19 혁명은 1960년, 이승만 대통령 정권이 이기붕 부통령을 당선시키려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해 투표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주도한 혁명이다. 우리 대학에서는 같은 달 26일 학생 300여 명과 교수 100여 명이 이를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학보 기자들도 이를 취재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 

기사에는 혁명 당시, 서면을 활보하는 우리 대학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서의 내용과 '정부는 물러가라'고 외치는 격문을 담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사와 함께 실린 학생들이 데모를 위해 교문 앞에서 운집하고 있는 사진은 당시 부당함을 척결하고자 했던 우리 대학 학생들의 결의를 보여준다.

16일, 남포동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에 관한 이야기로

교정이 술렁이기 시작

부마민주항쟁(이하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5일,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해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하면서 시작된 운동이다. 16일, 우리 대학 학생들도 해당 운동에 참여해 7천여 명이 '독재타도', '유신헌법철폐', '야당탄압중지', '빈부격차해소'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부마항쟁 당시에는 기사를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국가에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해 언론을 철저히 검열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18일 작성된 육군의 상황일지에 의하면 박정희 정부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떨어진 뒤 8시간 만에 언론 통제를 감행했다. 이 때문에 1979년에 나와야 할 우리 학보 부마항쟁 기사는 10년이 지난 1989년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1989년, 본지 제695호에는 '부마항쟁 일지'와 '17년 유신독재에 파혈구를 뚫은 부마항쟁', '아직도 살아있는 독재타도의 함성' 3개의 기사가 실렸다. 10년 전 부마항쟁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기사다. '부마항쟁 일지'에서는 1979년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부마항쟁이 일어난 경위를 알 수 있다. 10월 16일 우리 대학 학생들은 부산대 학생들과 함께 남포동 일대에서 시위를 펼쳤다. 

17일에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항쟁을 이끌었으나 20일, 시위에 가담한 청년과 학생들이 연행됐다. '17년 유신독재에 파혈구를 뚫은 부마항쟁' 기사에서는 당시 부마항쟁에 참여한 우리 대학 교수·학생과 좌담회를 실시해 △부마항쟁의 정치·경제적 성격 △우리 대학이 주도했던 17일 부마항쟁 △경찰에 연행된 학생·시민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직도 살아있는 독재타도의 함성' 기사에서는 부마항쟁 당시 시위 참여자들을 인터뷰해 부마항쟁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6월 29일 우리는 「최초의 승리」로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첫 발판을 다져놓고 있다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다. 본지 기자들은 이를 취재하기 위해 6월 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학보사에서 취재부 차장으로 활동했던 김대오(전자공학 '91 졸) 동문은 "6월 항쟁 이전부터 취재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부산지역 대학신문기자연합회를 결성했고 사전 취재반도 만들었다. 우리 대학 학보사에서는 승학캠퍼스 학생회관에 특별취재본부를 구성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나 취재가 마냥 순탄하게 진행됐던 것은 아니다. 6월 항쟁을 취재할 때, 외부의 압력이 있었다. 김대오 동문은 "가톨릭 센터 농성이 해산될 때 자발적으로 취재팀을 해산하면 연행하지 않겠다는 경찰의 교섭이 있었다. 결국엔 우리 학보 취재팀들은 해산됐지만 남부서로 모두 연행되는 소동이 발생했다"고 했다. 

열띤 취재 끝에 본지 제645호에 '남포동에서 서면에서 … 「민주화」를 꽃 피우다'와 '6월 「민주화 투쟁」 일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애국시민 단결하여 사기정권 끝장내자'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앞세운 시위대의 모습과 시위대를 연행하는 경찰의 모습 등 시위 현장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태춘 동문(무역학 '86 졸)이 사경을 헤매다 끝내 숨진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김대오 동문은 "부산진 시장에서 서면까지 항쟁하던 중 이태춘 열사가 경찰과 대치하다 최루탄을 맞아 추락사했다. 그때 우리 학보에서 단독으로 현장 취재를 했다. 그저 사고사로 남을 뻔한 사건을 우리 학보에서 호외로 보도한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또한 6월 10일에서 7월 1일까지 △가톨릭 점거 농성 △최루탄 추방의 날 △6·29 선언 등 각 날짜별 시위 상황을 일지로 적었다. 김대오 동문은 "당시 6월 항쟁은 동아대학보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소강됐을 것이다. 학보가 역사적인 차원에서 기록을 제대로 남기고 보도를 충실히 함으로써 6월 항쟁을 넘어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식농성을 벌이던 … 9명의 학생들이 …

학원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화·민주화·통일을 위해

계속적인 투쟁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6월 항쟁과 더불어 1980년대 후반은 학원 민주화 투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본지 제644호에서는 '「학내 민주화」 등 요구 시위'라는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는 1987년 5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이뤄진 학생들의 학내 민주화 요구 시위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시국선언 서명교수의 신분보장과 우리 대학 공대 교수의 「전방입소교육」 인솔 교수 교체에 따른 해명을 요구하면서 비롯된 시위다. 이 시위는 28일, 학교 측에 △시국선언 서명교수 신분보장 △교수공개 채용 △교양독서 및 이데올로기 비판 시험 폐지 등 학원 내 비민주적요소 타도를 요구하는 12개 조항을 요구하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29일, 호외로 나온 '정총장, 89년 3월에 퇴임하겠다'는 기사를 살펴봐도 학원 민주화의 열풍이 심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총장과 관련된 족벌·파벌 교수로 인해 대두된 문제다. 당시 학내 민주화를 위해 협의된 「총장 담화 24개항」의 이행 결과가 발표됐는데, 족벌·파벌 교수에 대한 문제가 뚜렷하게 해결된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끊임없이 투쟁했고 총장 퇴임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시기 취재 기자로 활동하던 김대오 동문은 당시 총학생회장 및 간부들과 함께 총장 사택을 방문해 동행 취재를 했다. 그는 그 기록을 수첩에 적어 속보로 보도했다.

 

 


언론 탄압에 맞선 학보

▲1990년 학보 탄압으로 대자보를 붙이는 기자의 모습

이렇듯 학생 운동과 함께 나아가며 학보는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게 됐다. 그러나 학보의 길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학보의 편집권과 보도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는 과정이 있었다. 

법과대와 전자공학과 학생 1백50여명이 지난 11일 학보사로 몰려와 … 편집권 침해 여론이 일고 있다

1990년에는 당시 (부)총학생회장이 소속된 법대와 전자공학과 학생들이 학보사로 난입해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학보사를 찢고, 집기를 들어냈다. 제705호 기사에 실린 '현 총학 선거 자금 줄, 정 전 총장 측근'이라는 기사 때문이다. 당시 총학생회 재단이 200만 원 가량의 선거 자금을 총장으로부터 지원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총학생회장은 탄핵을 당했다. 


그 이후의 사건을 보도한 것이 학보 제708호에 실린 '학보사 난입, 집기 들어내'라는 기사다. 기사에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 △학보사 측에서 발표한 성명서 내용 △사태와 관련한 학생처장의 입장을 담고 있다. 찢어진 학보가 가득한 바닥에서 멀쩡한 학보를 찾아 줍는 기자들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당시 활동하던 학보사 기자들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 철야농성을 했다. 김대오 동문은 "당시 철야농성을 하면서 성명서도 만들고, 사설도 썼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쓰면서 버텼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동아대학보>가 지난 한 학기 동안 발행되지 못했다. … 이 점에 대해 …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위 문구는 본지 제935호에 쓰인 '학보 발행을 재개하며'의 사설 내용 중 일부다. 2000년에는 한 학기 동안 학보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학보사 기자들이 학보 제작을 거부한 것이다. 우리 대학이 '언론탄압 문건'을 만들어 학보사를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총학생회 기획실에서 발견된 '2000학년도 학보사 예산 요구서 관련 의견'이 발단이 됐다. 요구서에는 '학보가 특정 집단의 대변지로 전락했기 때문에 건강한 신문으로 거듭날 때까지 예산삭감이 필요하다'는 내용과 '학생들 마음대로 학보 발행 횟수를 조정하게 두면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아대학보사 신문제작 거부 (미디어오늘, 2000.04.27.)>

당시 본지 기자였던 박성아(경영정보학 '07 졸) 동문은 그때 상황에 대해 단순히 학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영향도 컸다고 언급했다. 그는 "1997년도에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우리나라 경제가 피폐해졌다. 이 때문에 1997년 이후의 대학생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진리와 가치를 망각하고 경제적인 논리에 편입돼 발생한 사건"이라고 했다. 학보를 다시 되살리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박성아 동문은 "1년 가까이 철야농성을 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2학기 때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한 학보

민주화 쟁취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섰던 과거와 달리,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현시대의 대학생은 소수자·청년·인권 등 여러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학보도 역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문제에 관한 기사를 담고 있다.

성적 지향이 다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일 뿐

최근 이태원 발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성 소수자를 향한 과도한 혐오가 논란이 됐다. 이러한 사회의 경멸은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고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등 꾸준히 문제시돼왔다. 학보는 이러한 문제를 놓치지 않고 기사를 통해 다뤄왔다. 지난 2018년 10월에 발행된 제1146호 8면 '무지개 빛 연대를 꿈꾸다' 기사에서는 우리 대학 학생 568명을 대상으로 성소수자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는 사안에 대해 학보가 학내 여론을 살핌으로써, 대학생 성소수자 인식이 어떠한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본 기사에서 이어지는 <"나는 당신 옆에 존재한다">라는 기사는 우리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 중인 학생과 인터뷰를 진행해 눈길을 끈다. "비성소수자들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터뷰이는 "성소수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각각의 개인으로 바라보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생각을 들어봄으로써, 사회는 그들에게 어떠한 태도가 필요한지 제시했다. 

당신은 오늘 몇 개의 장애물을 넘었습니까?

우리 대학에도 장애인이 존재한다. 제1148호 4면 '모든 학생이 활보할 수 있는 캠퍼스를 꿈꾸며' 기사는 학내 장애인들이 캠퍼스 내부,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함에 주목했다.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은 점자블록·승강기 등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다면 캠퍼스를 이용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에 본 기사는 우리 대학 장애인 학생이 캠퍼스를 편하게 다닐 수 있는지 진단했다. 기사에서 우리 대학 장애 학생 도우미는 "언덕이 많은 우리 대학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등·하교하기에 힘들다"며 장애 학생이 캠퍼스를 다니면서 겪는 여러 애로사항을 설명했다. 이어 함께 배치된 '배리어프리(Barrier Free)로 모두가 BE FREE' 기사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보행권 확보 척도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 대학 부민·승학캠퍼스 배리어프리 지도를 싣기도 했다. 이는 주변의 상점을 대상으로 휠체어 접근 가능, 장애인 화장실 유무 등을 표시한 것으로 기자들이 직접 발품을 팔아 제작했다. 

우리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여성을 향한 폭력은 일상적이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차별받기 일쑤다. 지난 3월에는 N번방·박사방 사건과 같은 성 착취 범죄가 드러나 사회적인 공분을 낳았다. 지난해 5월에 발행된 제1151호 4면 '여성은 왜 분노했나' 기사는 여성들의 불법 촬영·남성 약물 카르텔·임신 중절 합법화 문제 규탄 시위를 눈여겨보며 해당 문제와 대책, 부실한 법과 제도를 살펴봤다. 특히 남성 약물 카르텔 문제 부분에서는 성범죄에 이용되는 약물을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허점을 증명하기 위해 기자가 실제로 약물 판매자와 연락을 취했다. 해당 호 5면에는 4면 기사의 연장선으로 우리 대학 학생은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자 <여성들은 왜 분노했나>라는 좌담을 펼쳤다. 최근 페미니즘 운동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성스러움을 탈피하기 위한 '탈코르셋' △여성 혐오 표현을 남성에게 적용하는 '미러링' 등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가 넘치는 지금, 우리는 스마트시대에 살고 있다

본지가 학내에 미치는 파급력이 컸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에는 학보의 구독률이 낮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학보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고자 학내·사회 문제뿐만 아닌 대학생이 주목할 만한 트렌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난 3월 제1157호 5면 '길거리 곳곳 전동 킥보드, 우리 삶에 가까워지다' 기사는 최근 길거리에 속속 등장한 전동 킥보드를 소개하며 여러 전동 킥보드 공유 서비스에 대한 요금, 이용 방법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어 기사는 전동 킥보드의 편리함만 강조하는 대신 위험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기사 속 <같이 타볼래? 스마트 모빌리티> 르포에서는 기자가 전동 킥보드를 직접 탑승해봤다. 체험을 통해 전동킥보드 공유서비스의 요금을 기존 교통체계 요금과 비교하고, 대학 캠퍼스에 적용했을 경우를 상정하여 서비스의 경쟁력과 활성화 방안에 대해 분석한 점이 인상적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박세현(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3) 학보편집국장은 "동아대학보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선배 기자들이 추구해왔던 대학언론의 가치와 본질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대학언론의 역할을 다하되, 디지털미디어 이용률이 높은 독자들의 수요에 부응하고자 뉴스레터 전송, 영상 제작, QR코드를 이용한 SNS 연계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신문은 딱딱하다'는 인식을 지닌 학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한 이슈를 폭넓게 다루고자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선배들이 써 내려오신 기록처럼 이러한 시도가 동아대학보의 역사로 남길 바라는 바"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난, 널 버릴 수 없다』 (동아대학보사 기자동문회 1999), 『동아대학교 50년사』


 박주현·김성주 기자, 김정은 인턴기자
〈일러스트레이션=임효원 기자, 정영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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