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최초의 민주혁명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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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0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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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벌써 62년 전이네요. 19살이던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 전국에 280명밖에 없으니까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국가권력과 시민들이 충돌한 사건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대규모 충돌 사건은 바로 1960년 4월 19일에 있었던 '4월 혁명'이다. 4월 혁명은 1960년 2월 말부터 4월 26일까지 이뤄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의 몰락으로 마무리되며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의미하는 전국적인 저항운동이었다. 

▲1960년 4월, 부산대학교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
<제공=(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故 김주열이 쏘아올린 '민주혁명'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바다의 수면 위로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은 부릅뜬 채 왼쪽 눈에는 포탄같이 생긴 쇠붙이가 박힌, 참혹한 몰골이었다. 고(故)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었다. 故 김주열 열사는 마산 3·15 의거 당시 시위의 선봉에 섰다. 그는 마산시청 앞에서 순국했으나, 경찰은 시신을 남해 바다에 수장해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故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27일 동안 밀물을 타고 흘러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당시 신문기자였던 허종 씨가 찍은 처참한 주검 사진은 전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에 빠트렸다. 그의 시체는 곧 제2의 항쟁인 4월 혁명의 불씨가 됐고, 정부는 항쟁을 막기 위해 초등학교를 제외한 전국 각 학교에 3일간 등교 중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마산과 창원의 통금시간을 오후 7시에서 이튿날 오전 5시까지로 연장하는 등 시민들을 더욱 옥죄어 왔다. 

4월 혁명이 일어나기 4일 전인 1960년 4월 15일, 마산상고와 마산고 학생 50여 명이 용마산과 제비산 마루턱에 집결해 현수막을 들고 애국가와 만세를 고창했다. 또한, 부산에서도 오전 11시 동래고 학생 1,000여 명이 거리로 뛰어나왔으며 △전주 △인천 △청주 △진주에서도 민주당원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고 전단을 뿌리며 행진한 사건은 비로소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1960년 냉전시기 전후로 자유 진영에서 최고 권력자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퇴진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4월 혁명은 한국 현대사와 아시아 민주주의 확립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된다.

 

▲1960년 4월, 우리 대학교 동문들이 가두행진하는 모습.
<제공=(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62년 전, 아픈 부산의 기억

부산에서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은 고등학생 시위로 시작됐다. 당시 정권의 부정과 부패로 인해 지역민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태였으며,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당시 부산지역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이승만 집권기를 '민주주의는 말뿐이고, 독재주의가 활개를 펴고, 12년을 활보해 국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인 시기'라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부산의 고등학생들은 공명선거와 학원의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내세우며 △벽보 부착 △삐라 살포 △시위 기도 등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부산민주공원 김종기 관장은 "몇몇 학자들은 4월 혁명을 두고 서울에서 주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라고 하는데, 부산에서 고등학생들과 일반 빈민층을 중심으로 더 격렬하게 일어났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4·19 민주혁명회 부산광역시지부 김용성 지부장은 당시 19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민주혁명에 참여한 국가유공자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의 규모는 지금 생각해도 굉장하다. 정말 앞뒤도 보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부정·부패를 타도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김 지부장은 "시위 도중 친구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혀 그때부터 내가 앞장서 시위를 이끌었다. 나와 모두가 죽음의 위기를 느꼈지만, 애꿎은 사람들이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전쟁터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시위 참여자는 고등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대학교에서도 가두시위를 계획해 많은 동문들이 합세했다. 당시 우리 대학 학생위원장과 정치학과 학생장 간부 등 많은 학생들이 모여 계획을 세우고 선언문을 작성했으나, 다음 날인 4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결국 500여 명의 우리 대학 학생들은 교문 밖에 집결해 선언문을 낭독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일부 학생들은 '피를 보러 가자'며 극적인 투쟁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1960년 5월 1일에 발행된 본지 제57호 1면에는 '본교 학도의 애국적 의거', '본교 학생들 데모를 감행, 학생 선두로 교수님 뒤 따르고' 등 4·19 혁명 당시 우리 대학 학생들의 시위 내용이 보도됐다. 해당 기사에는 당시 재학생들의 성명서와 격문이 담겨 있었다.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우리 학생은 과감히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며 평화적 시위를 자행한다. (중략)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를 바쳤고 이제 우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바칠 때가 온 것이다.’

같은 해 6월 15일에 발행된 본지 제59호에는 '젊은 꽃들아 고이 잠드소서, 경남 의거학도 희생자 합동 위령제 엄수'라는 기사를 통해 4·19 혁명으로 목숨을 잃은 경남 지역 의거 희생자들을 기리기도 했다.

 

▲4·19 민주혁명회 부산광역시지부 김용성 지부장이 본지 기자와 인터뷰 하는 모습.
<사진=조민서 기자>

 

"피를 토할 정도로 고문 당했다“

김용성 지부장은 "시위에 앞장선 탓에 시위가 끝난 후 시청에 가면 주동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오른팔에 총상을 입어 피를 흘리던 친구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동부산 경찰서로 가 서장 면회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면회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길래 '왜 들여보내 주지 않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막무가내로 서장실에 들어갔다. 그들은 나와 일행들을 '빨갱이'라 부르며 우리를 체포했다"고 진술했다.

『부산민주운동사』 저서에 따르면 비상계엄 선포 후, 시위에 참여한 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검거가 이뤄졌다. 부산진서에서는 19일 밤부터 용의자 검거에 착수했으며, 20일 오전 10시까지 동부산, 부산진 경찰서에 연행된 인원은 총 189명이었다. 경찰은 검거된 자들의 성별과 신원 등을 극비에 부쳤으며, 어떤 죄목으로 처리할 것인지 조차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김 지부장은 "체포된 뒤 피를 토할 정도로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고문이 끝나고 새벽에 하수구로 내팽겨쳐졌는데, 이틀 뒤 부산진역 앞을 지나가던 지게꾼이 하수구에 소리가 난다며 나를 발견해 인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위독해 추후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살아나오긴 했지만 당시엔 죽기 직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후송된 육군병원의 한 층 병상 환자들은 모두 저항 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군의관과 간호사들이 나와 사람들을 극진히 치료해 줬던 게 기억난다.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고문 후유증이 점점 심해져 매일 병원에 다니고 있다"며 고문으로 남은 흉터를 기자에게 보여 줬다.

4월 혁명이 처음부터 혁명이라고 정의되진 않았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는 혁명이 아닌 평범한 데모로 인식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선 후, '4월 혁명론'이 등장하며 이에 관해 공개적 논의가 시작됐다. 처음엔 4·19가 의거였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리고 4·19 혁명을 거쳐 4월 혁명으로 변화해 왔다. 정권의 퇴진에 초점을 맞춰 의거라 칭했고, 이후 중기적 국면을 설정하고 좀 더 긴 호흡으로 바라봐 혁명이라 지칭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항쟁에서 희생자들이 의거를 선호했다면, 학술연구자나 사회연구자들은 정치적 목표를 내재한 혁명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다.

김용성 지부장은 "최초에는 4·19 혁명을 혁명이라 말하지 않았고, 당시엔 오히려 평범한 시민들을 집결한 데모로 인식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김영삼 정부부터 혁명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유공자에 대한 예우도 추가됐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매일같이 병원에 가지만 혁명가라는 명목으로 국가에서 병원비 무료나 △KTX 연 6회 무료 △2000CC 이하 차량 면세로 구매 가능 △주차비용 할인 등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또한, 사망시 국가에서 태극기를 붙여 주며 장례를 치러 준다고도 알고 있다. 유공자를 예우해 주는 국가에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비상계엄 선포 후 계엄군과 시민이 대치 중인 모습.
<제공=(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4·19 정신, 왜 이어가야 하는가

4월 혁명은 한국 전쟁 이후, 민주화 운동의 서막을 연 중요한 저항 운동이다. 그럼에도 4대 항쟁 중 발생 시기가 가장 오래돼 4월 혁명의 의미가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우리 대학 김승민(국제무역학 4) 학생은 "4·19 혁명이라고 하면 단지 이승만 독재정권의 선거 비리, 부정과 부패에 대항한 사건이라고만 알고 있다"며 "그리고 마산에서의 故 김주열 열사 시체 발견을 시발점으로 시위 규모가 부산과 전국으로 커졌다는 정도로만 알고, 부산에서 어떻게 투항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주화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부산시 중구 영주동에 위치한 민주공원은 우리나라 민주항쟁을 기리기 위한 장소로 4·19 광장과 민주항쟁 기념관, 부산광복기념관 등의 시설이 설치돼 있다. 특히 4·19 혁명과 부마 민주항쟁, 6월 항쟁 등 민주항쟁과 관련한 자료들이 보존되고 있어 관련 전시나 체험학습을 통해 민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김종기 관장은 4월 혁명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 "민주공원의 주된 업무는 우리나라 4대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이 4대 항쟁 중 첫 번째가 4월 혁명"이라며 "특히 4월 혁명은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유일하게 적혀 있을 정도로 의미 깊은 항쟁이다. 5·18 민주화 운동과 부마 민주항쟁과는 다르게 이 항쟁에서는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김용성 지부장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의 주요 혁명들도 혁명의 구성원들이 4·19처럼 주로 학생이거나 청년들이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을 보면 '지금 상황에서 당시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맞서 일어설까?'라는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라며 운을 뗐다. 

이어 그는 "물론 내 예상과 달리 모두 하나가 돼 부정·부패를 타도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과 청년들이 애국심을 조금 더 가졌으면 좋겠다"며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안위를 중요시 하는 것 또한 이해한다. 그럼에도 한 나라를 살아가는 시민이기 때문에 청년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애국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덧붙였다.

김승민 학생은 "우리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고 보존되기 위해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자체나 정부에서 역사 관련한 콘텐츠를 제작해 SNS나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린다면 잊혀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의견을 전했다.

박서현·조민서 기자

<참고문헌>
『부산민주운동사』(안상연,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지역에서의 4월혁명』(정근식 외 1, 한국민주주의연구소, 2010)
『4·19 혁명』(김정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5)
『부산민주운동사 1권』(송기인,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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