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동료들과 핼러윈을 즐기러 이태원에 갈 생각이었다. 전날 서울행 기차를 타려던 참에 일이 생겨 상경하지 않았고 이태원 약속은 무산됐다. 그날 밤 일찍 잠들었고,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켜니, 무슨 영문인지 서로의 안위를 묻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불안감에 얼른 티브이(TV)를 틀었다. 이태원이었다. 참사 현장을 보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혹여나 예정대로 이태원을 향했다면,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사가 나의 일이 될 수 있었기에 그로부터 일주일간은 가슴이 구멍 난 기분으로 살아갔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이 그랬을 터다.
이번 참사는 20대 희생자가 104명으로 가장 많았다. 우리 20대는, 8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수많은 또래를 잃었다. 이번 10.29 참사로 우리는 또래를 또 잃은 것이다. 세월호와 이태원은 우리 세대 모두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었다. 나의 수학여행이 참사가 됐을 수도, 나의 핼러윈 파티가 비극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 동질성은 집단 트라우마가 됐다. 두 참사의 공통적 원인은 국가의 부재였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34조 6항에 국가의 책무가 버젓이 나와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직접 인정했듯, 10.29 참사 당일 분명히 국가는 없었던 것이다. 핼러윈 파티에 간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분명히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의 잘못이다. 국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렇담 우리는 국가가 부재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탈하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 속에서 우리 세대에게 말하고 싶다. 20대 공동체 모두는 10.29 참사 현장에 있었다. 사력을 다해 희생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우리가 있었고, 남 일처럼 한가롭게 참사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가 있었다. 이태원은 연대와 냉소가 공존하는 작금의 공동체와 다를 게 없었다. 이제 그 이태원을 응시하자. 살아남았다는 집단적 부채 의식을 가지자. 그리고 참사가 일어난 현 상황에 분노하자.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자. 기본권도 지켜주지 못한 국가에 책임을 묻자.
각자도생을 위해 지리멸렬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은, 옆 사람이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부축해주는 것이다. 서로를 돌보자. 더 나아가 기억과 망각의 투쟁 속에서 10.29 참사를 똑똑히 기억하자. 훗날 기성세대가 물러가고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또다시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않는 비극을 만들지 말자. 이것이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박주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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