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했던 역사 속 학생회, 다시 역사를 품어라
격렬했던 역사 속 학생회, 다시 역사를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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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0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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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교는 1946년 개교해 올해로 77주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학생자치기구 역시 학교와 함께 하고 있는데, 곧 다가올 제57대 학생회 선거에 맞춰 지난날 우리 대학 학생회 선거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70년대 초, 투표장에 들어가는 학생회 모습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학생자치회

 

본지 제36호에 따르면, 학생회 첫 선거 시작은 1958년 11월 7일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이하 총학)는 지금의 총학생회라는 명칭이 아닌 학생위원회로 지칭됐으며, 이때 선거는 학생위원회 상위 기구인 대의원총회의 투표로 총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당선되는 간선제 방식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1959년 11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선 선거 방식이 직선제로 변경됐고 선거를 담당하는 선거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에 따라 총위원장과 학생회 임원들을 학생들이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학생회를 직접 뽑을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당시 정부에서 학생들의 안보 의식 고취를 위해 학도호국단을 결성했다. 하지만 실상은 군사정부가 각 학교 학생 조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에 따라 우리 대학 역시 학도호국단으로 인해 1958년부터 1960년 4·19 혁명 이전까지 학생자치기구는 공백 상태였다. 그러나 4·19혁명 성공 이후, 학도호국단이 폐지됐고 이에 따라 각 학교에는 학생회라는 자치 조직이 결성됐다. 이때 우리 대학은 부산 최초로 학생자치회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세를 입어 1960년 12월 1일 학생자치회 회장단 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문리대 △농대 △공대 회장 투표함에서 *봉인이 찢어지고 열쇠가 열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참관인 측의 항의로 개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작성된 본지 기사에 의하면 투표함의 열쇠는 참석자 중 특정인이 실수로 연 것으로 보이나 봉인이 찢어진 것은 계획적인 소행으로 의심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개표는 재개됐다.


투표함과 관련한 선거 헤프닝은 그 다음해에도 발생했다. 1961년 2월 12일 시행된 학생회 간부 총선거에서는 총회장 개표 도중 농대, 공대 투표함을 개함하려는 순간 투표함이 파손돼 있는 것이 발견됐다. 이에 선거위원회에서 2시간 가까이 수습책을 모색한 후 투표함 파손은 개표원의 부주의였음이 판명되기도 했다.


또 1962년 10월 15일에 진행된 학생회 간부 총선에서 우리 대학 선거 역사상 유례없는 투표와 개표 과정이 모두 생략된 무투표 당선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학생회 간부를 비롯한 5개 단과대 회장은 모두 입후보 등록만으로 당선됐다. 


무투표 당선 사태를 겪은 총학 선거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총학 집행부가 구성된 지 40일이 지나도록 예산안을 확정 짓지 못했다. 당시 대의원회 측은 예산안 제출을 요구했으나 받지 못했다며 총학생회장의 탄핵 소추 발의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총학생회장 탄핵은 다른 방식으로 시행됐다. 1975년 7월 유신정부에 의해 *문교부의 학도호국단 설치령이 내려지며, 총학은 학도호국단에 흡수됐다.


이로부터 5년간 학생자치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운영됐다. 1980년 4월, 학도호국단이 사실상 폐지되며, 총학이 부활해 투표율 64.59%로 신해주(철학 3) 학생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곧바로 같은 해 9월 22일 학도호국단이 다시 실질적 활동을 시작하며 현재 학생회가 문교부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총학을 전면 백지화시키고 학도호국단 총학을 출범시켰다.

 
당시 전두환의 군사정권 아래 결성된 학도호국단은 학생자치기구 선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고, 이는 군사정권 하에 검증이 완료된 사람으로 총학을 구성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학도호국단 산하 총학이 새로 구성됐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학도호국단도 정부에 의해 막을 내렸다. 학도호국단이 완전히 폐지됨에 따라 1985년 3월 총학은 다시 학생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 4월 15일 진행된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71.3%로 매우 높은 투표율이 집계됐다. 각 단과대별 투표현황 역시 체육대가 무려 89.5%를 기록했으며 뒤이어 △농과대 85.1% △예술대 83.7% △이과대 77.7% 등 오랜 시간 공백을 깨고 돌아온 총학 선거에 화답하듯 당시의 높은 투표율을 자랑했다. 

 

▲총학 선거 후, 후보자들끼리 악수하는 모습

 

폭행과 사퇴 행렬로 얼룩진 총학생회장 선거 

 

그러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3월 이동규(기계 3) 총학생회장은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그는 "대의원회 측 탄핵 발의와 관련 없이 충분한 자질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해 스스로 사퇴를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동규 총학생회장의 사퇴 발표 이전, 대의원회는 △학원민주화(민주화운동) 투쟁에서의 오류 △선거 투쟁 때 김대중 거명 △감사 결과를 이유로 총학생회장을 탄핵 발의한 바 있다. 이후 치러진 1988년 5월 선거에서 투표율 55.4%, 득표율 37.3%로 제21대 총학은 무사히 꾸려졌다. 


그러나 제21대 총학 역시 임기가 한참 남은 시점인 같은 해 9월 2일 총학은 또다시 돌연 사퇴를 발표한다. 학생회 집행부 자체 회의에서 △거금횡령설 △총학 사업 태도 부실 △총학 내부 혼란 야기를 이유로 사퇴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총학은 김철원(토목공 3) 총부학생회장이 총학생회장 업무를 대신하는 권한대행체제로 전환됐다.


하지만 이러한 권한대행체제는 곧 폭력을 불러왔다. 학내비리 척결을 위한 정화위원회(이하 학정위)는 현재 권한대행체제가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했다며 김철원 총부학생회장 사퇴를 종용하며 총학생회실을 방문했다. 이에 김철원 총부학생회장이 "당장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자 학정위 노영주(자원 3) 회장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며 5분 내 사무실을 비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철원 총부학생회장이 이에 응하지 않자, 학정위 노영주 회장을 포함한 전 대의원 의장 조정락(법 4), 전 대의원회 부의장 정홍민(도시공 3) 등 학생들이 총학생회실 집기를 파손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유리창을 깨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 또한 이를 취재하던 본지 사진기자를 향해 죽고 싶지 않으면 카메라를 내리라며 협박과 구타를 하는 등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폭력으로 얼룩진 선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1989년 11월 제23대 학생회 선거 유세 중 또다시 발생했다. 당시 본지를 통해 밝혀진 사건 경위는 체육대학 학생회장으로 출마했던 우호상(체육 2) 학생이 낙선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거 유세 운동을 하던 총학생회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을 피켓으로 사용하던 각목 등으로 내려쳐 폭행했다. 추후 조사를 통해 우호상 학생은 "낙선 후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술을 먹고 가던 도중 감정적인 문제로 피켓을 부수고 구타했다"며 폭행과 관련된 잘못을 인정했다.


그로부터 약 2주 후, 치러진 제23대 총학생회 선거에선 손종호(법학 2) 학생이 총학생회장, 김정호(전자 3) 학생이 부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당시 총대의원회는 "타 대학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럽고 졸렬한 부패 선거"라며 총학생회 선거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선거 과정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과 더불어 양측 후보자 간 근거 없는 유언비어, 인신공격 등이 나돌았고 이를 유인물로 제작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선 전부터 여러 구설에 휘말렸던 제23대 총학은 임기를 다하지 못한 채 탄핵당했다. 손종호 총학생회장이 선거운동 당시 정수봉 전 총장 측근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선거 자금을 전달받은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인데, 이 사실이 당시 본지 제705호 1면에 실리면서 알려졌다. 곧바로 총대의원회의 임시총회가 소집되며 총대의원회 이민호(금속 4) 의장은 "선거 자금 지원설은 일정 정도 사실"이라며 손종호 총학생회장을 탄핵했다.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

 

과열된 선거 퍼포먼스에 대비되는 낮은 투표율

 

폭력과 탄핵으로 시끄러웠던 학생회 선거가 한차례 물러가고, 1992년 11월 제26대 총학생회 선거는 이승종(신문방송학 3) 학생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 연예인을 초청한 선거운동과 선거운동원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고등학생까지 운동원에 포함하는 등의 과열된 선거유세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이런 과열된 선거 퍼포먼스는 이후에도 계속되는 흐름을 보였다. 1994년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 과정에서 기호 1번 후보는 고구려 의상을 본뜬 개량 한복을 입고 선거운동에 임했으며, 승학캠퍼스 108계단에서 즉석 바이올린 연주회 등으로 학생들의 시선을 끌고자 하기도 했다. 이에 기호 2번 후보 역시 빈 깡통을 이용해 대형 공룡과 공룡 그림이 그려진 소형 현수막을 내걸어 유권자들의 관심을 얻고자 했다. 


그 외에도 양측 후보는 PC 통신을 이용해 첨단 선거전을 연출하고 컬러판으로 제작한 각종 대자보와 선전물로 캠퍼스를 물들이기도 했다. 또 1995년 11월 총학생회 선거 유세에서 20여 명의 경영대생들이 부산갈매기를 부르며 후보자들을 응원했고 한 후보는 황금호랑이 가면을 쓰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녀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선거 유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학생회에 대한 관심은 저조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1995년 11월 진행된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선관위와 양측 후보의 합의로 투표 시간을 1시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52.6%의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또한 학생회 후보자 역시 점차 단독 입후보로 변해가며 제30대 학생회 선거에서는 총학생회장을 뽑는 선거마저 단독 입후보로 당선됐다. 한때 8명씩 출마했던 총학생회장 후보가 이제 단독 입후보로 변한 것이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투표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증명하듯 2000년 12월 치러진 제34대 총학생회장 선거는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선거 세칙에 따라 제1차 연장투표가 실시됐다. 하지만 49%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이후 제2차 연장 투표까지 실시하며 50.88%의 투표율로 간신히 마무리되기도 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학생회 선거를 기대하며

 

1958년 처음 시행된 우리 대학 학생회 선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간선제와 직선제의 형태로 다사다난하게 진행돼 왔다. 그렇다면 오는 29일부터 이틀간 치러질 제57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학생들은 차기 총학생회에 어떤 걸 바라고 있을까.


A(고고미술학 3) 학생은 "본인들이 하고 싶어서 나오는 것이니 임기 중간에 책임감 없이 그만두는 일 없이 묵묵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라며 의견을 전했다.


이어 B(경영학 3) 학생은 "이번 학생회처럼 차기 학생회도 학생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C(생명자원산업학 1) 학생 역시 "학생들과 더 자주 소통, 학생회를 더 많이 홍보하면 좋겠다"며 바람을 전했다.

 

 


 박혜정·정유진 기자

 

*문리대: 대학에서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이학(理學) 부문을 전공하는 학과인 문리과 대학을 줄여 이르는 말. 
*봉인: 유권자들의 표가 담긴 투표함을 개표 때까지 밀봉해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는 특수 재질의 스티커
*문교부: 교육·과학에 관한 업무 및 교과용 도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행정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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