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특집]그 날, 그곳에서는
[한국전쟁 특집]그 날, 그곳에서는
  • 서성희
  • 승인 2012.06.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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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62년이 지난 2012년 6월, 우리는 전쟁을 알지 못한다.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조차 전쟁을 실감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전쟁을 겪지 못했다. 다만 스크린과 텔레비전을 통해 그 참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텔레비전이나 스크린 밖에 있다. 현실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 넘는다. 우리가 밟고 있는 평화로운 이 땅도 그 날에는 죽고 죽이는 살육이 벌어졌던 참혹한 전장이었다. 그 날,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태극기 휘날리며 - 피의 능선 전투



▲〈태극기 휘날리며〉 포스터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만큼 낙동강 방어선 전투, 평양 전투 등 다양한 전투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형제인 두 주인공이 적으로 만나 극적으로 조우하는 '두밀령 전투' 장면이다. 두밀령 전투는 영화에서 만든 가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강원도 양구에는 동명의 '두밀령'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지역 또한 '피의 능선'이라 불리며 영화에서처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피의 능선은 전투가 벌어지던 3개의 고지(983고지, 940고지, 773고지)를 잇는 능선을 말한다. 1951년 8월 당시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983고지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지형적 요충지이기도 했고,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이 아군의 보급로와 군사행동을 포격으로 방해하곤 했기 때문에 국군으로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고지였다. 이후의 공격을 위해서라도 이 고지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능선 전체가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뤄 인민군의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1951년 8월 17일 아침, 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다음달 3일까지 이어졌다. 나흘에 걸친 공격으로 8월 21일에 이르러 국군은 '773고지' 점령에 성공하고 다음날 '983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국군의 부대 교체시기를 틈타 22일 밤에 공격을 시도했고, 26일에는 대규모의 역습을 감행했다. 결국 포위되고 만 국군 제36연대는 후퇴해야 했다. 이후 9월 초가 될 때까지 능선 공격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능선 측면 공격이 성공하면서 국군은 인민군이 점령 중이던 983고지를 수복할 기회를 맞았다. 9월 3일, 인민군은 결국 983고지에서 후퇴했고 국군 제36연대는 이틀 후 983고지를 점령했다. 국군의 승리로 돌아간 전투였지만 양측의 피해 모두 참혹했다. 국군은 326명이 전사했고 2,400여 명이 다치거나 실종됐다. 미군 제1사단 또한 1,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면 북한군은 1만 5,00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전장을 목격한 미군 신문 <Stars and Stripes>지의 종군기자들은 이곳을 '피의 능선'이라고 보도하며 당시의 참혹함을 표현했다.

 

#전우 - 평양 탈환 전투



▲〈전우〉 전투장면

한국방송(KBS)의 간판 전쟁드라마 <전우>는 특정한 전투를 조명하기보다 한국전쟁 전체를 소재로 한다. '13사단 이현중 분대'라는 가상의 분대를 통해 한반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재현한다. 드라마는 '평양 탈환 전투'로 시작한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23연대가 38선을 돌파하며 드디어 북진이 시작됐다. 국군 제1사단과 유엔군까지 북진을 시도하면서 인민군은 사실상 궤멸된 상태였다. 북진은 곧 한반도의 통일과 북한 정권의 붕괴를 의미했다. 더불어 북한의 수도인 평양 점령은 상당한 의미를 가졌다. 당시 평양 선점은 국군과 유엔군 내 모든 부대의 관심사였다. 특히 미 제1군단의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의 평양 탈환 경쟁은 양국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밤낮으로 행군한 국군 제1사단은 10월 19일, 마침내 대동강에 이르렀다.

대동강만 건너면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일 오전 11시경, 철수하던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 철교를 폭파시키며 시간을 지연시켰다. 대동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대동강 지형에 익숙한 국군 제1사단은 별도의 장비 없이 도하를 감행했고, 마침내 미 제1군단보다 하루 빠른 19일 밤 평양으로 돌입할 수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적 수도 평양 탈환'을 기치로 걸고 평양시가 중심부로 돌입했다. 10월 19일,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평양 시가전이 시작됐다.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은 북한정권인민위원회 등 주요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평양 탈환의 영광을 얻게 됐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평양을 점령했지만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했던 점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 때, 평양으로 돌입했던 부대 중 일부라도 도망가기 바쁜 북한 전쟁지도부를 쫓았다면 이후 전쟁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고지전 - 백마고지 전투



▲〈고지전〉 포스터

영화 <고지전>은 '애록고지'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집중한다. 사실 애록고지는 실존하는 지역이 아니다. 애록고지는 남과 북이 전쟁 막바지까지 치열하게 사투를 벌였던 그 유명한 '395고지', 일명 '백마고지'를 모델로 한다. <고지전>은 이 백마고지 전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한국전쟁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고지전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소련과 미국은 전쟁이 어느 누구의 승리로도 끝날 수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1951년 7월, 양측은 지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했고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전선이 형성된 이 시기가 휴전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곧 휴전 회담이 시작됐고 이제 전투의 목적은 휴전 발효 시점에 더 많은 고지를 선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더 많은 고지를 선점한 채 휴전협정이 발효되면 그만큼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이 때문에 이전에는 이름조차 없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격전의 현장으로 바뀌어 갔다.

철원군 묘장면에 위치한 395고지는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일 격전이 벌어졌던 '철원-평강-김화' 삼각 전선의 남서쪽 꼭짓점이 이곳에 형성되면서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떠올랐다.

더구나 1952년 10월, 쉽게 타결될 듯 보였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전선은 더욱 격화됐다. 395고지 일대의 상황도 급변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국군 제30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395고지 일대 진지에 포격을 퍼부었다. 피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3일 만에 양측은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열흘 동안 무려 12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뀐 끝에 중공군 제38군은 백기를 들었다. 해발 400m도 채 되지 않는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은 30만 발의 포탄과 1만 7,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395고지는 포격으로 인해 높이가 1m 정도 낮아졌다.

이후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며 국군 전투 역사의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적 1개 군단을 궤멸시킨 제9사단에게는 백마부대라는 호칭이 붙었다.

 

#포화속으로 - 포항지구 전투



▲〈포화속으로〉의 한 장면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중략)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중략)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글을 씁니다.(중략)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 학도병 이우근의 편지 중에서 -

영화 <포화속으로>는 포항 전투에 참전한 71명의 학도병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위 편지는 포항 전투에 참전 했던 이우근 학생이 직접 쓴 것이다. 당시 이 군의 나이는 16살. 편지에는 소년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과 두려움이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이 군은 끝내 어머니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동해안지구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지연작전을 펼치던 연합군은 최후의 전선인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낙동강 방어선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뤄져 보급이 어려운 대신 방어가 쉬웠기에 인민군 제5사단의 전진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동해안 지구의 낙동강 방어선은 40km 가까이 붕괴됐으며, 포항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자칫하면 낙동강 방어선이 한순간에 무너질 상황이었다.

당시 국군 수도 사단에는 수백 명의 학도병이 종군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부대를 옮김에 따라 수도 사단에서는 이들 학도병들에게 '집에 가도 좋다'고 했으나, 그들 중 71명의 학도병은 자신들의 지휘관을 따라 자원해서 포항으로 갔다. 포항에는 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포화속으로>의 주 배경이 되는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다. 8월 11일, 포항 시내까지 진입한 북한군은 포항여중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학도병들은 지급받은 소총 1자루와 실탄 400여 발만으로 북한군에 맞서게 됐다. 학도병들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탄약도 수류탄도 모두 떨어지게 됐고 3사단 사령부마저 말도 없이 후퇴하면서 북한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인민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71명 중 48명이 전사, 4명 실종, 남은 13명이 포로로 잡히며 학도병 중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그러나 이들의 분투는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을 지연시켰으며 포항 시민들과 주요 행정기관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희생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총성과 비명이 이어져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영화와 드라마는 결말을 맺고 끝이 나지만 한반도의 전쟁은 여전히 결말을 맺지 못한 '휴전' 상태다. 그날에 전투가 벌어졌던 그 곳. 총성은 들리지 않지만 오늘도 누군가는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의 형제고, 친구다. 그들은 오늘도 빛바랜 '상상'이 아닌 '현실'을 지키고 있다.

글 = 박성훈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 김승언 기자
동아대학보 제1096호 2012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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