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영화관] 슬픔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
[미술관 옆 영화관] 슬픔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
  • 정혜원 기자
  • 승인 2013.12.09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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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와 <슬퍼하는 남자>
▲ 제임스 앙소르, <슬퍼하는 남자>(1892년 作).
▲ 영화 <올드보이> 포스터.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처음, 중간, 마지막에 되풀이되는 이 구절은 생각 없이 입을 놀려 15년 동안 감금되고 결국 스스로 혀를 잘라야 했던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의 고통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의 시 '고독'에 나오는 한 부분으로 오대수가 감금된 방에 걸려 있는 그림 <슬퍼하는 남자>에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고통에 허덕이는 오대수의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슬퍼하는 남자>는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James Sidney Ensor, 1860~1949)가 1892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시 면류관을 쓴 승천하기 직전의 예수 모습을 담고 있다. 예수는 눈은 울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감금 됐을 당시 오대수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고 있지만 더럽혀진 얼굴에 길게 늘어뜨린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어 오히려 불행해 보인다. 그림 속 예수와 영화 속 오대수에게는 선과 악, 희열과 고통이 서로 공존하고 있다.

벨기에 출신인 앙소르는 표현주의 화가이다. 표현주의는 1910년 전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등장한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 공포, 기쁨 등 작가 내면의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사회에 살았던 앙소르는 종교적인 믿음보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고, 물질적 풍요에 치중했던 당시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이런 감정은 <슬퍼하는 남자>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괴상하게 그려 당시 예수 또한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고뇌만을 지닌 존재로 표현했다.

오늘날 표현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 앙소르는 극도로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를 통해 격렬하고 고뇌에 가득 찬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그는 거친 형태, 톱니 모양의 선들을 사용했다. 어두운 도상으로 격렬하고 거칠게 그려진 <슬퍼하는 남자>는 오대수의 비극과 맞닿아 그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오대수와 <슬퍼하는 남자>는 동일시된다. 최면으로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은 그는 딸 미도를 여자로서 사랑하게 된다. 그는 기억을 지우려 최면술사를 찾아간다. 영화는 이곳에서 미도와 오대수가 서로 끌어안으며 끝이 난다. 미도를 끌어안은 오대수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은 그가 최면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끊으려 했지만 결국 끊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영화 <올드보이>는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그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슬픔을 이겨내고 싶다면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 본 오대수를 통해 그 용기를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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