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협상 그 이후 …
한일 위안부 협상 그 이후 …
  • 유선영
  • 승인 2016.10.0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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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아직 날지 못했다

 지난 추석 연휴 문화체육관광부는 귀성길에 오른 국민들에게 정부 소식지를 배포했다. 소식지는 정부의 10가지 업적 중 하나로 지난해 12월 28일 이루어진 위안부 협상타결을 소개했다. 또 위안부 협상에 대해 "24년 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인근에서 24년째 열리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 피해자와 시민단체들의 수요 집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12. 28 한일 합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해 다시금 결과를 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 1247차 수요집회에서 시민들이 작년 12월 28일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를 비판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계속되는 집회, 끝나지 않은 문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의안이 최종적으로 체결됐다. 일본 정부는 협의안에서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 이에 따른 피해보상금 10억 엔을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사용, 위안부 피해자들의 치유에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 등 5개 단체는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12.28 한일합의 강행규탄 및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한일합의는 애당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위령, 책임자 처벌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한일합의는 무효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10억 엔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 스스로 배상금이 아니며, 법적 책임 또한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선언했다"며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에 참여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88) 할머니와 김복동(90) 할머니도 "끝까지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받을 때까지 싸워나가겠다"며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죄를 요구했다.

 

피해자들의 봄은 오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위안소를 설치했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 다수의 여성이 강제동원되어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조선인 여성들은 취업을 미끼로 끌려오기도 했고 협박 및 폭력으로 강제 동원되기도 했다. 이밖에 인신매매나 유괴 등의 방식도 사용됐다. 피해자 노청자(2004년 별세)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 게시된 증언 영상에서 "고향에서 그렇게 밭매다가 붙잡혀 갔으니께. 끌려가서 뚜껑 없는 기차, 그냥 한 차로 싣고서 갔지"라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끌려간 위안부들은 가시철조망을 둘러친 좁은 건물 안에 갇혀 매일 60~70명 정도의 군인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 항상 성병과 임신의 두려움 속에 살았고 생리 도중에도 성을 제공할 것을 강요받았다. 피해자 김순악(2010년 별세) 할머니는 "십분 걸리는지 이십 분 걸리는지 그것도 몰라. 눈 질끈 감고, 막막 고기 잡는데 고기 벌려놨는거 한가지라, 우리는"이라고 위안소 생활을 증언했다.

 이런 만행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됐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광복 이후 돌아오는 길도 험난했다. 어렵게 귀국한 후에도 피해자들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가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 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실제로 피해자 문옥주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하루는 외숙모가 집에 와서 '양반 집에서 너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야단을 했다. 어찌 됐건 나는 이후 일가친척들에게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이것이 하도 서러워 울기도 많이 했다"고 당시 설움을 증언 영상에서 털어놨다.

 이런 피해자들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1995년 출간한 『일본군 군대위안부』(도서출판 소화, 1998)에서 일본군 위안부 수는 8~2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조선인 여성의 비율이 절반이 넘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되풀이된 조약·협정 …
사과와 배상 언급은 없어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한일 양국은 외교, 영사관계를 개설하고 국권침탈 및 그 이전에 양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경제협력자금을 받았다. 특히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는 청구권 자금 3억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이때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청구권도 함께 배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원폭 피해배상소송 등에서는 "피해자 개인이 상대국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배상청구권을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며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며 위안부 문제와는 다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후 1990년 한겨례신문에 연재된 '정신대발자취를 찾아서'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같은 해 5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처음으로 위안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11월에는 37개 여성단체와 개인이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했다. 1991년 8월에는 김학순(1997년 별세)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처음으로 위안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피해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 덕분에 1992년 미야자와 수상이 한국을 방문해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년 뒤인 1993년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두 담화 모두 법적인 책임과 배상에 대한 부분은 회피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항의하며 꾸준히 수요집회를 이어갔다. 1,000차 수요집회를 한 2012년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국제사회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주목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013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장이 방한해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일본이 전 세계인이 아는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견해를 밝혔다. 2014년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개최됐다. 한일 정부는 이 회담에서 "책임 이행의 전제 아래 서로 최종적, 불가역적 이해를 확인한다"고 합의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식적으로 두 나라 사이에서 종결됐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조항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두 조항에 합의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 없도록 했다. 또 민간단체 소유인 위안부 소녀상 철거 가능성도 내비쳤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란 없다"
 한일 합의가 이루어진 날,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114개 단체에서는 "한일 양국 정부가 들고나온 이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그리고 국민들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에 다름 아니다"며 성명문을 통해 협상타결을 비판했다. 대다수 위안부 피해자들도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9) 할머니는 올해 7월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살아있는데, 본연히 여기 있는데 무슨 협상이냐"며 협상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또 올해 1월 김복동, 이용수, 길원옥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0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문제 합의안이 국제인권 기준과 권고사항에 미치는지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청원서를 UN에 직접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 평화 나비 지부 회장을 맡고있는 김민수(고신대) 학생도 이번 위안부 협상에 대해 "지금 상황에서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또 일본 정부가 제안한 화해·치유 재단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인정한다면 일본 정부 자체에서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 또 거출금이 아니라 배상금이 되어야 하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거출금 명목으로 지출했다. 거출금이라는 건 인도적 차원에서의 기금을 뜻한다"며 "결국은 과거의 아시아평화기금과 다를 바 없는 것이거나 국민들과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로 화해·치유재단을 발족한 점을 본다면 더 후퇴한 것이 된 것"이라고 전했다. 소녀상 철거 문제에 대해서도 "끝까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부산에서도 일본 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김민수 학생은 "할머니 한 분이라도 '문제가 있다. 거부한다'고 하신다면 끝까지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것이 평화 나비의 목적이다. 이게 끝났을 때가 바로 저희가 해체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 대학교 홍순권(사학)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국가 범죄 행위에 대한 일본의 분명한 태도 표명이 중요한데 이번 합의에서는 그런 부분이 명백히 되어있지 않고 단지 '책임'이라고만 되어있다. 일본 정부가 실질적으로는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합의를 한 것도 큰 실책이라고 판단한다"며 위안부 합의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또 소녀상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는 여전히 소녀상 이전이 합의의 전제조건인 양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반박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 점을 보아서도 이번 위안부 합의가 미흡하게,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한편 최근 우리 대학에서도 교내에 소녀상을 세우려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동아대학교 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 장영훈(무역학 4) 학생은 "예전 일제강점 당시에 가장 많은 위안부가 끌려간 곳이 부산이다. 부산이 이런 지역적 상징성도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학이 앞장서서 (소녀상 건립을) 처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며 건립 취지를 말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에 위안부 문제를 청산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오를 다시 범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부산 지역의 명문이라고 불렸던 우리 동아대에서 모든 학교 구성원들이 앞장섰으면 좋겠다"며 소녀상 건립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이들은 내년 3.1절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시행을 목표로 올해 9월부터 활동하고 있다.


참고자료
여성가족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http ://www.hermuseum.go.kr/), 한국정신대문제대 책협의회 (www.womenandwar.net)
도움 말씀 주신 분 : 서주향(사학과 석사과정 4학 기, 기록관리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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