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기행 모티] 대청로 131번 길
[부산기행 모티] 대청로 131번 길
  • 백장미 선임기자
  • 승인 2013.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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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 : '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 잘못된 일이나 엉뚱한 장소라는 의미로도 쓰임

네온사인 반짝이는 화려한 장소도 사람 붐비는 복잡한 중심가도 아니다. 본지는 '모티'를 통해 부산 사람도 몰랐던, 혹은 너무 익숙해 쉽게 지나쳤던 일상 속의 장소를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 골목도 그렇다.

모티가 찾아간 첫 번째 골목은 '대청로 131번 길'이다. 이곳은 200m 남짓 짤따란 골목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중앙동 40계단을 향해 내려오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대청로 131번 길은 '천·지·인(天·紙·人) 골목' 중 '종이(紙)거리'다. 중구청에서 개최한 '거리 갤러리 미술제'를 통해 탄생한 천·지·인 골목은 부산지방기상청으로 이어지는 하늘天거리, 인쇄 골목인 종이紙거리, 광복동 용두산 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자리한 꿈의 人거리로 나뉜다. 기자가 종이거리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소박하게 펼쳐진 벽화가 마음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대청로 131번 길이 '종이거리'로 불리는 것은 1960년대부터 대청동과 동광동 일대에 인쇄소가 빼곡히 자리 잡은 까닭이다. 지금도 이 골목을 비롯해 윗길과 아랫길에 위치해 있는 인쇄소만 해도 약 200개에 달한다. 취재 중 만난 주민에 의하면 70~80년대에는 선거철마다 쓰였던 모든 홍보물이 이곳에서 인쇄됐다고 하니 과거에는 분명 이 골목이 '인쇄의 성지'였을 것이다.

▲ 종이거리 초입에 위치한 교련복 남학생 벽화.

이러한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듯 골목 초입에는 얼룩무늬 교련복 차림의 남학생이 갓 인쇄된 신문을 배부하고 있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벽화의 제목은 'yesterday(예스터데이)'. 1982년 10월이라는 벽화 속 시간으로 추측컨대, 프로야구팀 OB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원년 우승을 알리는 신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골목 중간쯤 들어서면 작은 식당과 인쇄소 사이에 위치한 '인쇄골목사전(1960~2012)'과 마주할 수 있다. 빨간 표지의 사전은 두꺼운 철로 만들어져 있어 '열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전은 지난 50여 년 동안 인쇄골목이 걸어왔던 이야기들을 펼쳐 보여준다. 열여섯 페이지로 이뤄진 이 사전 속에는 옅은 물감으로 그려진 인쇄 골목과, 골목의 찰나를 담은 사진, 그리고 이곳에 있었던 인쇄소 명함이 각 장을 장식하고 있다. 펼치기도 덮기에도 조금은 무거운 사전 한 장 한 장의 무게감은 마치 골목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닮은 듯하다.

▲ 벽화 '꿈꾸는 책장'의 얼룩말 인간.

사전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입체감 있는 벽화를 볼 수 있다. '꿈꾸는 책장'이란 이름을 가진 이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꺼내 읽고 꽂아 둔 것 마냥 튀어나와 있는 책들도 있다. 책장에 기댄 채 책에 열중하고 있는 얼룩말 인간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곁에 서서 함께 낭만을 만끽하고 싶다. 아, 가방에 책이 있다면 꺼내도 좋다. 꿈꾸는 책장 옆에는 로맨티스트를 위한 나무의자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의자 위에 깔린 누르스름한 장판에는 누군가 매직으로 '쉬어 가는 곳'이라는 투박한 글씨를 새겨놓았다.

골목 끝에 늘어진 회색빛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면 40계단 중앙에서 아코디언을 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대청로 131번 길 골목은 그렇게 끝이 난다.

길 끝에 서서 걸어왔던 골목을 다시 뒤돌아본다. 방금 지나왔던 레스토랑 '별나다'와 골목 입구에서 만났던 20년 전통의 '서울식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빈티지 카페처럼 잘 꾸며진 레스토랑과, 매콤한 갈치찌개 냄새가 새어나오는 작고 허름한 식당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필자가 골목이 아닌 시간을 걸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골목을 너무 너무 사랑한데이." 골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인쇄소 주인아저씨의 걸쭉한 한마디가 귓가에 맴돈다. 그냥 이 골목이 예뻐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레스토랑 아저씨의 말과, 골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일상 하나하나가 감사하다는 서울식당 아주머니의 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대청로 131번 길을 그려보니 왠지 그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듯하다.

 

동아대학보 제1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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