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문화프리즘 l 부산, 영화의 도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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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희석 학보편집국장
  • 승인 2015.11.0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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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화,『부산의 영화 부산의 극장』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를 선보인 1895년 이후, 영화는 발전을 거듭했다. 영화 콘텐츠는 빠르게 진화했고 결국 예술의 한 분야로까지 자리매김했다. 세계 첫 영화가 상영되고 8년 후, 우리나라에도 영화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은 '활동사진'을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하며 입장료는 동화 10전을 받는다고 광고했다. 이후 한국산 극영화가 발표되고 한국 여배우 1호 '이월화'가 등장하는 등 국내 영화시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성장했다.

부산 역시 이러한 신문물의 파도 위에 몸을 실었다. 국내 최초 영화사인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는가 하면, <해의 비곡>(1924)이라는 작품이 부산에서 탄생하기도 했다. 부산 영화 역사에는 또 어떤 사건들이 있었을까.

안병화의 『부산의 영화 부산의 극장』(국제신문, 2005)은 이러한 부산 영화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부산 영화시장, 첫 부산국제영화제 뒤 숨겨진 일화 등을 책에서 다뤘다.

부산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영화사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서 만든 영화 <해의 비곡>(1924) 중 한 장면.

부산은 <해의 비곡> 제작 전까지 영화 제작보다는 소비도시에 가까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이 가장 먼저 이뤄진 탓에, 신문물을 소화해내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당시 "서울의 극단들도 부산을 필수 공연 코스로 여길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29쪽)고 하니 부산은 자타공인 영화 소비의 중심지였다. 이후 한국 최초 영화사 부산조선키네마가 설립되면서 영화 제작 도시로서의 기반을 다져갔다.

부산조선키네마의 첫 작품 <해의 비곡>은 큰 흥행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발표한 <운영전>(1925)은 <해의 비곡> 수입의 절반도 못 미쳤다고 전해지며 그 외의 두 작품도 딱히 큰 수익을 내지 못했다. 수익 면에선 실패했을지 몰라도 부산조선키네마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불리한 부산에서 한국 최초로 주식회사 체제의 영화사를 설립했다는 점과 서울에서도 1사 1편의 영세한 자본에 의해 운영됐는 데 비해 4편까지 제작한 점은 큰 의미를 갖는다."(33쪽)

한국 최초의 영화사가 부산에 생겼지만, 정작 부산 현지에서 촬영과 제작 모두 이뤄지는 경우는 없었다. 이에 당시 진명학원을 설립해 우리말 가르치기에 힘쓰던 강영구는 1947년, 광복동 용두산 입구에 '부산예술영화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1년 동안 수영 소년교화원을 중심으로 촬영해 '첫 부산 현지 촬영·제작 영화'인 <해연>(1948)을 완성한다. <해연>은 평론가들에게 호평 받았지만, 많은 관객은 끌어모으지 못했다. 이처럼 지방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은 부산예술영화제작소도 금방 문을 닫았다.

<해연>이 흥행에 실패한 후에도 부산에는 지속적으로 소규모 영화사들이 들어섰다가 무너졌다. 그러다 결국 "1961년에 들어선 군부정권에 의해 무참히 싹이 잘리고 만다. 영화사 강제 통합조치에 의해 서울의 수도영화사에 흡수된 것이다."(38쪽)

이후 부산은 오늘날까지 영화 제작보다는 로케이션, 즉 영화 촬영지로서 각광을 받는 중이다. 1960년부터 1970년 말까지 35편, 1980년부터 1990년 말까지 26편이 부산에서 촬영되는 등 부산은 명실상부한 영화 촬영지로 자리매김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

여러 명작이 부산에서 촬영되는 동안, 부산에서 활동하는 영화인 및 평론가들은 커다란 계획을 준비한다. 바로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김지석, 이용관, 전양준은 잦은 영화합평회 활동과 영화학교를 운영하는 등 영화에 애착이 컸다. 이 셋은 1995년부터 곧바로 국제영화제 개최 준비에 착수하지만 여러 난관을 겪는다.

자금을 조달하겠다던 후원사가 갑자기 등을 돌리고, 운영팀을 구하려고 외국인까지 접촉하는 등 갖은 역경을 겪으며 1996년 9월 13일, 드디어 첫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막을 올린다. 당시에는 부산을 'Pusan'으로 표기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지금의 BIFF가 아닌 PIFF로 명기했다.

18만 명의 관객을 모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7개국의 영화 170편을 상영했으며 개막작은 영국 영화 <비밀과 거짓말>(1996)이었다. 수영만에 거대한 스크린을 세우고 관객들이 야외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첫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설립자 중 한 명인 김지석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다 보니 무엇 하나 풀린 게 없었고 영화제가 끝났을 때 모두들 10kg 정도 빠졌다"(125쪽)고 말했다.

이처럼 부산은 한국 영화 탄생의 시초에서 국제적인 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영화 도시로 성장 중이다. 하지만 "영화제가 너무 커지면서 백화점식이 돼 가고 있다"(214쪽)는 지적도 있다. 아시아 영화의 지속적인 발굴, 한국 영화의 세계 무대 진출 발판 마련 등 초기의 목적이 다소 옅어졌다는 뜻이다.

앞으로 국제영화제 측에서 "프로그램 조정 등을 통해 더 많은 아시아 영화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214쪽) 더욱 영화제가 발전하고, 현재의 명성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은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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