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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천하를 재단한 설계자제갈량과 유백온
정재훈 기자  |  hakbojh@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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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12  14: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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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왕들 옆에는 그만큼 뛰어난 책사들이 있었다. 제갈량(위)은 유비가 촉한을 세우게 한 일등공신이며 유백온(아래)은 일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주원장이 천하를 제패하도록 도움을 줬다. <일러스트레이션=이영주 기자>

역사상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왕들 옆에는 그만큼 뛰어난 책사들이 있었다. 한 고조 유방의 옆에는 장량이 있었고, 주나라 문왕의 옆에는 강태공이 있었다. 책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적벽대전의 주인공이며 유비가 촉한을 세우게 한 일등공신인 제갈량이다. 이런 제갈량보다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한 이가 있다. 일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주원장이 천하를 제패하도록 도움을 준 유백온이다.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제갈량 캐릭터의 모티브로 유백온을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유백온이 자신과 제갈량을 견준 것은 결코 허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유백온은 제갈량을 뛰어넘는 책사일까.

제갈량은 책사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유명한 지략가다. 그는 재야의 현인(賢人), 와룡(臥龍), 복룡(伏龍)등의 별호를 얻으며 명성을 떨쳤다. 당시 조조에게 패하고 형주에서 지내고 있던 유비는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그를 직접 찾아가 자신의 책사로 받아들였다. 이 때 생긴 고사가 그 유명한 '삼고초려'다. 제갈량은 중원지방은 조조에게, 오월지방은 손권에게 맡기고 유비는 서촉지방을 얻는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했다. 제갈량은 후에 오나라 손권과 연합하여 그 당시 가장 강한 군세를 가진 조조를 적벽에서 격퇴했다. 그 후 총 5번의 북벌을 강행하다 전투 중 과로로 생을 마감했다.

유백온은 제갈량에 비하면 대중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다. 유백온의 본명은 유기(劉基)이며 백온(伯溫)은 그의 자(字)다. 그가 살았던 원나라 말기는 조정 관리들이 이미 부패해 있었다. 그런 원나라에 실망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지내던 중 당시 홍건적이었던 주원장이 그를 찾아왔다. 주원장은 유백온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책사가 되어달라고 하나 백온은 "도적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거절했다. 하지만 주원장은 끈질기게 찾아가 그를 설득시키고 만다. 유백온은 주원장에게 먼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장 강한 군세를 지닌 진우량 세력을 치고 장사성을 공격하라는 내용이 담긴 '시무 18책'을 제안했다. 당시 진우량의 병사는 60만의 대군이었고, 주원장의 병사는 20만 남짓이었으니 전투는 불가했다. 그러나 유백온의 '시무 18책'에 따라 주원장은 진우량과의 파양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주원장은 북경으로 진격해 원나라를 쫓아내며 스스로 명나라 황제에 올랐다.

제갈량과 유백온은 제법 비슷한 삶을 살았다. 제갈량이 유비를 세 번이나 찾아오게 한 일이나, 유백온이 주원장을 여러 번 돌려보낸 일이 그렇다. 또 당시 일개 객장이나 도적에 불과한 사람을 각각 주군으로 택한 점도 흥미롭다. 책략 또한 닮았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간언하고, 유백온은 주원장에게 '시무 18책'을 제안했다. 사실, 이 두 책략은 당시 상황에는 맞지 않는 책략이었다. 아무런 지지기반 없이 조조에게 쫓기기만 하는 유비를 당시 승상이었던 조조나 강동의 호랑이 손권과 대적할 만한 세력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진우량 세력을 먼저 꺾어야 한다는 유백온의 책략 역시 당시 상황에서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자신이 내세운 책략을 달성한다.

두 사람은 천문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제갈량은 관우와 자신의 죽음을 천문지리로 예측을 했고, 유백온은 지금의 중국 명승지인 '유원촌( 源村)'을 천체의 별자리 형태를 따라 촌락을 배치하여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닮은 두 사람이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성격 면에서 제갈량은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반면 유백온은 모난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성격 탓에 말년에 유백온은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쓴 적도 있었다. 또 제갈량은 직접 군사를 이끈 적이 여러 번 있었으나 유백온은 전투를 직접 지휘한 적이 별로 없다. 결정적으로 유백온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제갈량은 그러지 못했다. 이는 후에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중국 사람들은 유백온과 제갈량을 라이벌로 생각하여 가상의 대결을 자주 붙였는데, 이 가운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명나라가 세워진 후 천하를 유람하던 유백온은 촉한의 땅에 다다르게 되었고, 날이 저물어 한 절에서 쉬게 됐다. 그 날 새벽, 닭이 없는 그 절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백온은 이상하게 생각해 주지에게 웬 닭이 우는 소리냐고 물었고, 주지는 웃으면서 "이 절에는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흙으로 빚은 닭이 있는데, 그 닭은 제갈량이 만들었습니다. 그 닭은 새벽만 되면 울어 시간을 알려줍니다"고 했다. 평소에 제갈량보다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한 유백온은 화가 났고, 그 닭을 보자마자 깨뜨렸다. 그 안에는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그 종이에는 '유백온이 닭을 깨뜨릴 것이다'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전 황조의 군사는 제갈량이고 후 황조의 군사는 유백온이다', '천하를 셋으로 나눈 것은 제갈량이고 강산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유백온이다'라는 말들만 봐도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유백온과 제갈량을 견주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더 뛰어났는지는 감히 평가하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역사에 길이 남을 책사였다는 사실이다.

※참고도서 <이상각, 『이기는 묘책, 역사를 바꾼 승리의 주역들이 갖고 있는 비밀』 케이엔제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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